무소륵스키[2]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로 흔히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작곡가 중 한명이며 이 5인조 뿐만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후반부터 비롯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의 고유한 색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벗어나 각국의 민족주의 음악과 프랑스의 인상주의에도 미쳤다. 그의 많은 작품이 러시아 역사와 민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러시아 민요나 토속음악을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인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그러한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무소륵스키는 대대로 부유했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6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배운지 3년만에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리스트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가문의 전통인 군 복무를 위해서,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를 평생 괴롭혔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이곳 생활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관학교 졸업 후 그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한다. 그의 군 생활은 음악적으로는 여러 유력 음악가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군 복무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 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알렉산드르 보로딘을 알게 되었고 이내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미하일 글린카 이후의 가장 유력한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와 친분을 쌓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교우관계는 음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로서, 그의 진짜 음악 인생은 이 시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도 있다. 무소륵스키는 세자르 큐이, 밀리 발라키레프 등과도 교우관계를 맺었는데, 후에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을 배운다. 그는 1858년 군을 떠나 음악에 전념하고, 초기에 발라키레프에게 음악을 배운 이후로는 그는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는다. 이 후,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고, 1863년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는다. 이 무렵부터는 더 이상 발라키레프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지 않고, 예전의 다르고미시스키와 더 가깝게 지낸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1861년 농노 해방으로 인해 토지의 반 이상을 잃게 되어 점차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1865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알코올 의존증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전성기는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르게는 "보리스 고두노프"가 작곡된 1868년부터 1873년, 늦게는 전람회의 그림이 작곡된 1874년 이후로 인생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점점 심해져갔고, 친한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정서적으로도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날로 심해지는 알코올 중독 때문에, 생계를 위해 택했던 공무원 생활도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1880년에 해고되어 생계수단이 끊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881년에는 구걸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친구에게 말할 지경으로 궁핍해진다. 이 무렵 건강도 심각하게 나빠져서, 4번의 연속된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입원을 한다. 입원 중에도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1881년, 그는 만 4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사망한다. 42번째 생일 일주일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