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의 인물

<다리오 : Darius >

헤븐드림 2021. 7. 15. 04:59

성경에 몇 사람의 다리오가 나온다.

 

 

메대 사람 다리오(Darius the Mede) : 다니엘서 5:30-31과 6:1 그리고 9:1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BC 539년 갈대아 곧 바벨론 멸망으로 ‘갈대아 사람 벨사살 왕’이 죽은 후 왕이 되었다. 그는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 명칭)의 아들(단 9:1)로, ‘나라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가 62세였다(단 5:31). 그는 ‘왕’의 칭호를 가졌으며(단 6:6, 9, 25) 다니엘 11:1에서는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라는 그의 통치 기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메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KJV은 다니엘서 9:1을 ‘메대 사람의 자손’- ‘the seed of the Medes’이라고 번역). 그는 3명의 총리를 두고 그 밑에 120명의 방백을 임명함으로, 당시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리비아와 애굽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의 광할한 지역에 이르는 메대-바사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할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단 6:1-2). 다니엘은 그때 임명된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리오 왕 시대와 고레스 왕의 시대’에까지 그 직임을 훌륭히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단 6:28).
그는 다른 총리들과 다니엘을 시기하는 관원들의 꾀임으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 사건으로 인해 다니엘의 하나님을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라고 고백했다(단 6:25-27).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Hystaspes) : 에스라서에 등장하는 ‘바사 왕 다리오’(스 4:5) 및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하던 시대의 ‘다리오 왕’에 해당하는 인물로,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다. 캄비세스를 계승하여 왕이 된 그는 BC 521-486년에 통치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20개의 행정구인 도를 총독이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참고, 스 5:3, 6).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그는 운하를 파고 도로를 정비함으로 상업을 증진시키기도 했다. 고레스 왕의 종교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러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스 6:1-12 참고).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 닷드내와 그의 동료 스달보스내의 요청(스 5: 3-17)으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합법성을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확인하고 즉각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을 독촉하는 한편 재정적인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스 6:8).
심지어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스 6:11)라는 조서까지 내렸다. 성전이 완공된 것(예루살렘이 파괴된 때로부터 70년 후)은 그의 재위 6년째 되는 해였다.

다리오 2세 노두스(Nothus) : 느헤미야 12:22에 나오는 ‘바사 왕 다리오’로, BC 423-408 기간 동안 바사와 바벨론을 통치했다. 느헤미야 12장에 언급된 다리오 왕이 다리오 3세 코도마누스(Codomanus)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직 일치된 견해는 없다.

다리오 왕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
메대 사람 다리오가 다니엘서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다른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그 시대의 상형문자 글들에서 나보니두스(Nabonidus)와 고레스 사이의 왕위 계승 사이에 다른 어떤 바벨론 왕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역사성이 부인되어 왔다. 게다가 성경 외적인 자료에 의하면, 방백제도(satrapy system)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후대의 다리오(Hystaspes; 히스타스페스)밖에 없으며, 그것도 전역에 대략 20명 정도의 방백밖에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역사적으로 혼동된 기억의 산물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계속적인 연구에 의해서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을 다스리던 벨-샤르-우쯔르(Bel-sar-usur; 히브리 음역=Belshazar)란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메대 사람 다리오를 역사적 회의주의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해서 여러 시도들이 있었는데, 다음의 세 가지 주된 견해들이 그것이다.
첫째, 메대 사람 다리오는 아카드의 문헌들에서 바벨론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는 구바루(Gubaru)라는 견해다.
둘째, 메대 사람 다리오를 고레스 대제와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다. 이 입장에서는 다니엘서 6:28의 ‘와우’(wau)를 접속사적인 용법이 아니라 설명적인 용법으로 보아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를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에, 즉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로 번역한다.
셋째, 그 시대에 쓰여진 왕의 칭호를 검토함으로써 추정한 입장이다. 신바벨론 시대에는 ‘바벨론의 왕’, 페르시아 시대 말엽에는 ‘열국의 왕’(the king of the Lands)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지만 그 사이의 페르시아 초기에는 이 두 칭호가 모두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등극년과 통치 1년의 시기 동안에는 ‘바벨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고레스는 ‘바벨론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속주를 통해서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속주가 바로 메대 사람 다리오라는 것이며, 이 다리오는 페르시아 군대의 장군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킨 구바루라는 것이다.
메대 사람 다리오의 역사성 문제는 아직까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성경은 비록 역사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의 우리의 질문들에 모두 대답해주기 위한 역사 교과서는 아니다. 성경 기록상의 침묵과 더불어 성경 외적인 자료의 결여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불확실성 속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리오는 누구인가-지난 과에서 공부한대로, 바벨론은 벨사살을 그 마지막 왕으로 하여 멸망했다. 그리고 바벨론은 정복한 메데 바사 연합국의 첫 왕이 다리오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메데’(the Medes)는 민족의 이름이고 그 민족이 세운 나라의 실제 이름은 메디아(Media)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로 불리웠으며, 1935년부터는 ‘이란’으로 호칭되었다. ‘바사’는 후에 ‘페르샤’ 왕국으로 불렸던 나라이다. 메데와 바사 제국은 같은 종족으로 이루어졌고, 종종 상호간에 전쟁이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메데 왕 시악사레스 I세(Cyaxares I)의 다음 왕은 아스티아게스였다.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그의 딸이 자신의 왕권을 위태롭게 할 대상이라고 생각되어 페르샤의 왕 캄비세스 1세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고레스 대왕이고, 메데는 결국 고레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된다.
고레스는 메데를 정복한 후에 그의 장인인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을 메데의 상징적인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시악사레스 2세이다. 다시 말하면 시악사레스 2세는 고레스의 외삼촌인 셈이다. 그리고 고레스는 그 외삼촌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시악사레스 2세는 고레스의 장인이기도 하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메데 바사의 연합군이 바벨론을정복하였을 때 그 실제적인 권세는 고레스에게 있었지만, 아마도 고레스가 자신의 장인이자 외삼촌인 시악사레스 2세를 왕위에 앉혔을 것이고, 불과 한 2년 후에 고레스가 그 뒤를 이어 왕권을 차지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다니엘 5장 마지막 절과 6장 첫 절에 등장하는 다리오는 시악사레스 2세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