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의 음악은 영재교육 음악과 치유 음악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모짜르트 효과 (Mozart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자 프랜시스 라우셔(Francis Rauscher) 교수팀이 처음 제기했다. 라우셔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큐 테스트를 하기 위해 모짜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 k.448」을 들려주었다. 이 음악을 들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보다 공간지각능력(spatial reasoning skill)에서 더 높은 점수가 나온 결과, 어릴 적부터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주장했다. 그 뒤로 모짜르트 음악은 영재교육 음악과 치유 음악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사진제공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이와 같이 모짜르트의 음악은 어린 상추 잎을 빨리 자라게 하고 어린이의 지능을 향상케 하며,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치는 ‘힐링’에 적합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이 가진 힐링 요소를 보면 첫째, 작품의 성격이다. 그는 대부분의 곡을 장조로 작곡하였으므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모짜르트가 언제나 밝고 행복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모짜르트의 자아가 태양을 품은 아이처럼,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스스로에게 늘 그대로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조로 표현된 그의 슬픔은 더 슬프고 또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현상을 따라서 듣고 있는 사람의 어두운 그늘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클라이넷 콘체르토 가장조 2악장이 있다.
두 번째, 완전하고 자연스럽다. 모짜르트를 천재 음악가로 손꼽는 이유이기도 한 부분이다. 음악학자들은 그가 이미 10세에 하이든의 50세 때의 작곡기법을 보여준다고들 한다.
곡을 만들기 위한 어떤 수고로움조차 없을 것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그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작곡하였다. 실제로 그의 오페라의 주요 멜로디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오페라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흥얼거릴 만큼 유명했다.
Wolfgang Amadeus Mozart
모짜르트, 천재가 되기 위한 조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아버지 레오폴트 모짜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Anna Maria) 사이에 일곱째로 태어났다. 위로 여섯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모짜르트보다 다섯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애칭 ‘난널’)와 함께 자랐다. 그의 이름에서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은 ‘신의 은총’을 뜻한다.
잘츠부르그 모짜르트 생가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선생님이며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부악장으로 일했다. 그가 집필한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저서《Versuch einer grundlichen Violinschule》은 18세기 음악 양식의 연구에 중요한 본보기로 전해지고 있다.
모짜르트의 양친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모짜르트에게 수유하지 않고 물에 꿀을 타서 먹였으며 가끔 곡물을 묽게 끓인 미음을 먹였다.
모짜르트는 곰 인형을 가지고 놀 때에도 피아노 연습하는 누나 난널 곁에서 놀고 싶어 했다. 3살이 되어 피아노 의자를 올라가 마구 건반을 두드리다 3도 화음을 치게 되었는데, 이 음에 아름다움을 느껴 옹알이 같은 가락을 노래했다. 레오폴트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4세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린아이 모짜르트가 30분 만에 작은 미뉴에트(minuet)를 완벽하게 연주해 내어, 음감과 리듬감은 물론이고 언어감각도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집중력이 뛰어나 숫자에 관심이 생기자 온 집안의 바닥을 숫자로 뒤덮었고 4세가 되어 집중해서 악보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6세 전에 이미 작은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하였다.
모짜르트는 학교 다닌 적이 없는데도 수학과 음악 그리고 독일어ㆍ이탈리아 어ㆍ프랑스 어ㆍ라틴어 등 다국어를 익혔다. 성정이 예민하여 주변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라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나요?”라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묻곤 하였으나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자식에게 영재교육을 한 레오폴트는 엄격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모짜르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신 다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
모짜르트와 연주 여행
천재 모짜르트가 우리나라의 토정비결을 보았다면 아마도 역마살에 도화살이 낀 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까? 6세의 생일이 막 지나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와 누나를 따라 뮌헨으로 첫 연주 여행을 떠나고, 그 뒤로 연주 여행은 그에게 삶이 되어 버렸다.
여행이라 하니,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이용한 낭만 여행을 떠올리겠으나 마차가 전부였다. 하루 40km의 길을 가는 유럽 여행은 강행군 속에서 이루어졌다. 파리ㆍ런던ㆍ네덜란드를 다녀오는 데 3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폭풍우가 거셀지라도 여행은 멈추지 않았으니 어린나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잠자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연주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도시에서 여러 차례 연주하는 동안 때로는 지역에 도는 전염병에 노출되는 위험도 허다했다.
여섯 살배기에게 연주 여행은 고되고 짜증나는 일이겠으나 몇 날을 마차 타고 새로운 도시로 이동할 때 이 어린아이는 그림 그리고, 작곡 하고, 이동식 하프시코드를 가지고 피아노 연습을 했다. 또한 어린아이답게 장난스럽고 익살스러운 말을 곧잘 하여 그러한 언어유희는 훗날 그의 서신이나 성악곡에 표현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이름 mozart(모짜르트)를 거꾸로 읽어 trazom(트라촘)이라고 말해서 주위사람을 한바탕 웃게 했다.
유럽의 대도시에서 몇 개월씩 머문 어린 모짜르트는 왕족과 귀족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금세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의 즉흥연주, 작곡, 밝은 성격에 열광했다. 연주 여행으로 수입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만나거나 음악회를 다니면서 음악적 견문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경쾌함과 유머, 재치가 있으면서 우아한 성품은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 먹어가는 어린아이는 더 이상 ‘어린 천재 소년’이 될 수 없어, 이제는 한곳에 머물러 안정된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귀족의 궁정악장으로서 있고자 하였으나 그의 자유분방함은 방해 요소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는 유랑자처럼 떠돌며 연주하는 사람을 황실의 궁정악장으로 두기 어렵다고 밝혔다. 게다가 다른 귀족들의 가문에서도 쉽게 자리 잡을 수 없을뿐더러, 잘츠부르크에서 오르간 주자로 있던 자리를 대주교와 불화가 생겨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짜르트의 사랑, 콘스탄체(Constanze)
Constanze Mozart
1781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빈으로 향한 모짜르트는 만하임(Mannheim)에서 알게 된 베버 부인을 다시 만나 그녀의 집에 하숙을 부쳤다. 1777년 베버 부인의 둘째 딸인 성악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였으나 아버지 레오폴트가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알로이지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 버리고 베버 부인은 두 딸과 함께 지냈다. 이때 모짜르트는 갓 열아홉 살 된 셋째 딸 콘스탄체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또다시 그의 아버지와 누나 난널이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식을 올렸다.
모짜르트는 오페라가 성공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는 듯했다. 콘스탄체와 결혼 생활하고 작곡에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나 자유분방함은 억제하지 못했다. 스무 살에 결혼한 어린 신부가 남편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과 태어난 아기들을 지켜줄 경제력이었다. 콘스탄체는 모짜르트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계를 책임져 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되레 더 많이 작곡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 것을 꿈꿨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때 파티를 즐겼고 모짜르트는 내기 당구를 즐겨 빚을 졌다.
모짜르트 죽음의 의혹과 그의 자녀들
1791년 12월 5일 새벽 1시. 35세 한 음악가의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해 모짜르트는 운명 같은 곡을 썼다. 오페라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의 하나인 대작 「마술피리」를 완성했고 재벌귀족 프란츠 폰 발제크(Franz von Walsegg)의 청탁으로 그의 부인을 위한 진혼곡을 작곡하는 중이었다.
진혼곡은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 모짜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죽음에 관해 많은 소문들이 무성했다. 그 하나는 비밀결사대 프리메이슨이 마술피리로 단체의 비밀을 세상에 알린 모짜르트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그의 영원한 숙적인 살리에리가 독살했다는 설이다.
또한 소문과는 달리, 현대 의학자들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서신과 모짜르트의 기록을 살핀 결과, 그가 류머티즘열에 동반된 급성관절염으로 죽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짜르트에게 류머티즘열은 어릴 적 연주 여행에서 몇 번씩 보였던 증상이다. 위생관리가 철저하지 못하고 긴 여행을 하는 어린 모짜르트는 자주 아팠고, 35세가 되어서 다시 발병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양 음악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등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서양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이다.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추구했으며,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 소나타, 오페라, 합창곡, 성악곡 등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음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야망을 버리고 오로지 아들의 음악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건반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무렵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건반악기 주자가 되었으며, 오르간과 바이올린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작곡에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해 6살 때 미뉴에트, 8살 때 교향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기록을 세웠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나이 6살이 되던 1762년,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를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이 모차르트 일가의 첫 번째 연주 여행이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어느 한 나라나 지역의 음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을 썼다.
연주 중인 모차르트와 누나 나넬, 아버지 레오폴트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했으며, 이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부른 궁정을 방문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으며, 여기서 쇼베르트의 건반음악과 글룩의 오페라를 감상했다.
1764년, 모차르트 일행은 프랑스 칼레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는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이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와 그의 동료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차르트 가족은 1765년 겨울은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길, 겐트, 로테르담, 헤이그를 여행했으며, 1766년에는 프랑스의 파리, 디종, 스위스의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르, 딜링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그해 11월,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1768년,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빈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바보 아가씨(La Finta Semplice)〉와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빈에서는 오페라 외에 바이젠호이스 성당의 헌당식을 위한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769년 말부터 1773년까지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밀라노의 사마르티니를 비롯해 이탈리아 음악계의 주요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를 여행했으며,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밀라노에서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를 초연했으며, 파도바에서 오라토리오 〈풀려난 베툴리아(La Betulia Liberata)〉의 작곡을 위촉받았다.
1773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교향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미사곡, 세레나데, 오페라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런 성공에도 그는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했다. 1년에 150플로린밖에 되지 않는 낮은 보수와 오페라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헨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1777년 8월, 그는 잘츠부르크 궁정 음악가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파리, 뮌헨 등을 방문했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에서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여행의 동반자였던 어머니를 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이려고 애썼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연봉은 450플로린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 자리를 마지못해 수락했으며,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에도 만하임과 뮌헨에 들러 다른 일자리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할 수 없이 1779년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 후로도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잘츠부르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1781년,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가 뮌헨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해 3월,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례식과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에 머물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소환을 받았다. 대주교의 부름을 받고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그가 자기를 종처럼 취급하는 것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툰 백작부인이 그에게 연주회를 제안했다. 잘츠부르크에서 그가 받던 보수의 절반이 넘는 연주료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대주교가 이것을 금지했다. 이 일로 불만이 극에 달한 모차르트는 대주교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자신을 해고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대주교는 매우 모욕적인 방식으로 그를 해고했다.
이렇게 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결별한 모차르트는 그 길로 빈으로 갔다. 대주교와 화해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강요와 회유가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무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다. 고용주의 속박에서 벗어난 모차르트는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수없이 많은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1782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독일 오페라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의뢰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ie Entfuhrung aus dem Serail)〉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전까지 오페라는 대개 이탈리아어로 쓰였는데, 모차르트는 이 작품을 통해 독일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후궁으로부터의 도주〉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와 더불어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해에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
1786년과 1787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지오반니(Don Giovanni)〉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런 걸작들을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모차르트는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는 안정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실 가족이나 귀족 앞에서 연주를 하거나 귀족 자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터키 간의 전쟁으로 귀족과 왕실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수입이 줄었다.
1787년 12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를 빈에 잡아 두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안했다. 리도우텐 홀에서 연중행사로 열리는 무도회를 위한 춤곡을 작곡하고 일 년에 800플로린을 받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모차르트에게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1788년, 모차르트 가족은 빈 근교로 이사를 갔다. 집세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 무렵부터 모차르트는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에게 아주 비굴한 어조로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도 썼다. 1789년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재정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프라하,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포츠담,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등지를 방문했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다.
그해 6월, 빈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왕실로부터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것이 1790년에 초연된 〈여자는 다 그래(Così fan tutte)〉이다.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발표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ote)〉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후 익명의 사람에게 〈레퀴엠(Requiem)〉 작곡을 의뢰받고 곡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1791년 12월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6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여흥을 위한 가벼운 음악부터 본격적인 연주회용 음악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가 여흥을 위해 작곡한 음악에는 세레나데와 디베르티멘토가 있다. 이 중 세레나데는 본래 밤에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였는데, 나중에는 기악으로 연주하는 모음곡 형태로 발전했다. 모차르트는 주로 귀족들의 오락이나 축제, 사교 모임을 위한 가벼운 음악으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 Musik)〉인데, 이것은 독일어로 '작은 밤음악(小夜曲)'이라는 뜻이다. 1787년 작으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느린 로망스, 3악장 독일 민속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활발한 분위기의 론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1776년 잘츠부르크 시장 하프너의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쓴 세레나데 제7번 '하프너(Haffner)', 우편마차나 역마차에서 사용하는 나팔을 6악장에 도입한 세레나데 제9번 '포스트호른(Posthorn)'이 있다.
모차르트는 독주 악기를 위한 작품으로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41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 피아노는 여성의 악기로 널리 인기를 끌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가볍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며, 대개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서정적인 아다지오나 안단테, 3악장 카덴차가 있는 경쾌한 론도로 구성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3악장에 '터키 행진곡(Turkischer Marsch)'이 나오는 제11번이다. 대개의 소나타는 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곡은 1악장이 변주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악장은 미뉴에트이며, 3악장이 행진곡풍의 론도로 작곡된 '터키 행진곡'이다.
실내악에서는 현악 4중주, 피아노 5중주, 현악 5중주, 클라리넷 5중주, 플루트 4중주, 오보에 4중주, 혼 5중주 등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남겼다. 대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다. 이 장르의 대표곡으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789년에 작곡한 〈클라리넷 5중주〉가 있다. 악기 편성은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 4중주 편성에 클라리넷 한 대가 추가된 형태이다. 1악장 소나타 형식, 2악장 목가적인 분위기의 느린 악장, 3악장 우아한 춤곡풍의 미뉴에트, 4악장 변주곡 형식의 경쾌한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클라리넷과 현악 4중주가 서로 대응 관계를 이루며 음악을 이끌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모차르트는 근대적인 의미의 협주곡 양식을 처음으로 완성시킨 작곡가로 꼽힌다.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45곡이나 작곡했는데, 독주 악기의 종류도 피아노, 바이올린,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보에, 혼, 클라리넷, 바순, 플루트, 플루트와 하프 등으로 다양하다. 이 중 바이올린 협주곡은 대부분 20세 때 작곡한 것으로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성도에서 있어서 나이를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여 준다. 한편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25곡으로 대부분 장조로 작곡되었다. 하지만 1785년에 쓴 제20번만은 이례적으로 단조로 되어 있다.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곡은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극적인 내용과 스케일의 방대함이 가히 교향곡에 비견할 만하다. 1악장 교향곡처럼 장대한 스케일의 소나타 형식, 2악장 노래하듯 연주하는 로망스, 3악장 활달한 론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역시 모차르트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모차르트는 8살 때인 1764년에 처음 교향곡을 쓰기 시작해 1788년까지 24년 동안 모두 41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은 대체로 하이든이 세운 교향곡의 틀, 즉 빠른 템포의 1악장과 4악장 사이에 느린 2악장과 미뉴에트풍의 3악장이 들어가는 고전주의 교향곡의 모범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이탈리아풍과 규모가 큰 빈풍으로 대별된다. 대부분의 교향곡이 장조이며, 25번과 40번만 단조로 작곡되었다. 41곡 중 마지막에 작곡한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주피터'〉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 1788년에 작곡한 〈교향곡 제40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1악장은 서주 없이 곧바로 제1주제로 들어가는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율이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분위기가 고조된다. 3악장은 소박한 민요풍의 미뉴에트 악장이며, 4악장은 높은 음역의 경쾌한 동기와 격렬하고 극적인 모티브가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썼는데, 독일어 오페라로는 〈후궁으로부터의 도주〉, 〈마술피리〉가 있고, 이탈리아어 오페라로는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여자는 다 그래〉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는 1786년에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이다. 이 작품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하나로 줄거리는 〈세비야의 이발사〉의 후편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로지나와 결혼한 알마비바 백작은 결혼 후에도 천성적인 바람기를 버리지 못하고 피가로와의 결혼을 앞둔 하녀 수잔나를 차지하려 한다. 이런 백작의 마음을 알아챈 백작부인과 수잔나, 피가로가 서로 짜고 백작을 골려 준다는 것이 오페라의 줄거리이다. 1막에서 피가로가 부르는 〈더 이상 못 나르리(Non piu andrai)〉, 2막에서 백작부인이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부르는 〈사랑을 돌려주오(Porgi amor)〉, 사랑에 눈뜬 소년 케르비노가 부르는 〈사랑의 괴로움 그대 아나(Voi che sapete)〉, 3막에서 백작부인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어디로 갔나 그 시절은(Dove sono)〉, 백작부인과 수잔나가 편지를 쓰면서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Che soave zefiretto)〉가 유명하다.
〈피가로의 결혼〉 1막 중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백작과 만나는 수잔나. 의자에는 케르비노가 숨어 있다.
1791년, 모차르트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로부터 〈레퀴엠〉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모차르트는 심신이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지만 적지 않은 보수를 준다는 말에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은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눈물의 날에(Lacrimosa dies illa)〉의 앞부분까지만 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머지는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가 남긴 초고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교회음악의 하나로 꼽힌다. 연주자로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독창자과 합창단, 오케스트라가 참여한다. 〈입제창(Requiem aeternam)〉,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진노의 날(Dies irae)〉,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 〈위엄과 공포의 왕(Rex tremendae majestatis)〉, 〈자비로운 예수(Recordare, Jesu Pie)〉, 〈꺼지지 않는 불길(Confutatis maledictis)〉, 〈눈물의 날에〉, 〈영광의 왕 예수 그리스도(Domine Jesu Christe)〉, 〈찬양과 기도의 제물(Hostias)〉, 〈거룩하시다(Sanctus)〉, 〈축복 있으라(Benedictus)〉, 〈신의 어린 양(Agnus Dei)〉, 〈영원한 빛(Lux aeternam)〉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도 교회음악으로 〈C단조 미사〉와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합창곡 〈아베 베룸 코르푸스(Ave Verum Corpus)〉, 모테트 〈춤추고 기뻐하라. 복된 영혼이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