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3.21~1750.7.28)
독일 바로크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아이제나흐 출생. 200여 년에 걸쳐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바흐가문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서양음악사를 집대성한 위대한 존재이며 우수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기 때문에 후대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솔로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작품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작곡가로서,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특히 19세기에는 G.P.팔레스트리나와 나란히 오랜 음악전통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면서 모든 음악가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이미 W.A.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여, <주피터교향곡>, <레퀴엠>을 비롯한 만년의 걸작을 완성했다. L.베토벤도 소년시절에 스승인 C.G.네페의 지시로 바흐가 지은 <평균율피아노곡집>을 배우고 ‘바흐는 작은 강이 아니라 큰 바다이다’(bach는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이란 뜻)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하였고, 큰 영향을 받았다. 바흐를 결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1802년에 출판된 J.N.포르켈이 쓴 <바흐전(傳)>과 1829년 20세의 F.멘델스존에 의해 베를린에서 실시된 <마태 수난곡>의 역사적인 연주에서였다. 더욱이 J.브람스는 베토벤을 능가하기 위해 창조력의 원천을 바흐에게서 찾았다. 현대음악의 문을 연 A.쇤베르크가 ‘12음기법’의 이론적 기초를 바흐의 대위법에서 구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바흐의 이름으로 작곡되어진 모든 음악들이야말로 어떤 대해보다도 드넓으며, 어떤 계곡보다도 깊고 오묘하다. 평생동안을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생활을 지겨 가면서 써낸 수많은 종교 음악을 비롯해서 기악곡과 관현악곡에 이르는 모든 부문에 이르기까지 바흐는 엄청난 대작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바흐의 작품번호는 오늘날 W. 슈미더가 엮은 <바흐작품주제목록(Bach-Werke-Verzeichnis;BWV, 1958)>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것에 따른다.
■ 일생
아른슈타트 시대(1703-1707)
1702년 봄, 미카엘 학교를 마친 바흐는 자활해야 했기 때문에, 1703년 3월부터 6개월 동 안 바이마르공(公) 요한 에른스트의 궁정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바흐에게 있어 이곳의 4년간은 모순과 문제로 가득찬 생활이었다. 성가대와 관계가 나빠져 결국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과 싸우게 되고, 더욱이 4주 동안의 휴가를 얻어 떠난 뤼베크여행도 4배나 길어져 성직회의에서 꾸지람을 받았다.
하지만 이 시대 북부독일의 뤼베크 성 마리아교회에서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아르시타트 시대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새로운 직장을 찾아 중부독일의 도시 뮐하우젠으로 옮겨 뮐하우젠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부활절 시험연주에서 칸타타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4)를 연주하면서 그는 눈부신 칸타타 창작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뮐하우젠에서 보낸 1년 남짓한 기간동안 <주여, 깊은 심연에서 당신을 부르나이다>(BWV131), <하나님의 때는 최상의 때>(BWV106),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BWV 71)와 같은 걸작이 씌어졌다. 1707년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든 바흐는 겨우 1년 만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바이마르 시대(1708-1717)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1708년 7월 23세 때의 일이다. 이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르간소곡집>(BWV599∼644)을 비롯하여 훌륭한 오르간곡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요한 에른스트의 부탁으로 A.비발디의 이탈리아협주곡을 오르간과 쳄발로의 독주용으로 편곡하였다.
1714년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된 바흐는 매월 한 곡씩 신작 칸타타를 연주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하늘의 왕이시여, 어서 오소서>(BWV182), <눈물 흘리며 탄식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다>(BWV12), <나의 마음은 피바다를 건너노라>(BWV199) 등의 많은 바이마르 칸타타를 남기게 된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풍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16년 12월 악장 J.S.드레제가 세상을 떠나자 후임에 그의 아들이 지명되어 바흐는 승진의 길을 놓쳤다. 눈을 밖으로 돌려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었던 그에게 쾨텐 궁정악장의 길이 열렸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였다. 그러나 바이마르공은 바흐의 사직을 허락하기는커녕 1개월 금고형을 내렸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한 쾨텐의 젊은 영주는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인 후대를 베풀었고,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악장에 취임하였다.
쾨텐의 궁정은 캘빈파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을 비롯하여 그의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라이프치히 시대(1723–1750)
좋은 환경 속에서 한때는 쾨텐에서 영주할 것을 결심한 바흐도, 1723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1660-1722)의 후임으로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라이프치히 주요 4교회에서 직접 지휘를 하고 교회음악을 맡게 되면서부터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그는 이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교회음악은 매주 예배 때 연주되므로 200곡에 가까운 교회칸타타와 ‘마태복음’, ‘요한복음’에 바탕을 둔 수난곡이 작곡되었다. 특히 1727년 초연된 <마태 수난곡>(BWV244)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마태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1730년은 전환기로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효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커피 칸타타 : 가만히 입 다물고 말하지 말아요>(BWV211), <농민 칸타타 : 우리들의 새 영주님>(BWV212) 등의 작품이 등장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트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이다.
또한 계몽주의의 영향에 따른 감각적이고 알기 쉬운 음악의 융성 때문에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간주한 바흐는 점차 자기 예술의 집대성을 목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작품 <피아노연습곡(제1부∼제4부, 1731∼42)>, <슈블러코럴집>(BWV645∼650,1748)이 출판되었다. <푸가의 기법>(BWV1080,1740)이 작곡되고 <미사곡 b단조>(BWV232)가 완성된 것도 이 일환에서이다.
마지막 작품이 된 이 장대한 미사곡은, 1733년에 작센 선제후(選帝侯)에게 바친 키리에(kyrie)·글로리아(gloria)를 제1부로 하였으며, 역시 기존의 상투스(sanctus)를 이용하면서 말년인 1748년 가을부터 실명 직전인 다음해 봄에 이르러 나머지 부분을 작곡하여, 완전한 미사곡이 되었다. 거기에는 전통적인 성악 폴리포니양식에서 당시 최신의 화려한 양식에 이르는 성악 작곡법의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의 헌정>(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의 기법>(BWV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헨델(G.F.Handel)과 함께 바로크시대를 총결산 했던 바흐는 1749년 봄 뇌졸증의 발작과 함께 시력감퇴 현상이 일어나 체력이 눈에 띠게 줄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력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 잘 못 돼서 결국 1750년 7월 28일 밤 8시 45분 경에 바흐는 위대한 65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부인 안나 막달레나가 임종을 지켜봤다.
바흐가 죽고 난 뒤에 그의 가족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으며 수많은 악보도 분실되거나 손상되어 버린채 그의 이름은 점점 세상 사람들의 귀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을 비롯한 후세 사람들의 끈질긴 노고에 힘입어 바흐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모든 곡들이 연주회장의 레파토리에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바흐의 음악작품들이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대접 받고 있는 이유도 그가 써낸 음악들이 인류의 정신사적 흐름을 가장 농밀하게 표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항상 신앙적 구도의 길을 버리지 않았던 생활관과 음악관이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흐야말로 인류가 갖는 가장 고귀한 음악가였다고 해도 좋을 그런 사람이었다.
'성가 클래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제프 하이든 (0) | 2021.02.16 |
---|---|
헨델에 대하여 (0) | 2021.02.03 |
감미로운 발라드 모음 (0) | 2019.10.06 |
HAUSER - "Live in Zagreb" FULL Classical Concert (0) | 2019.08.16 |
HAUSER - "Live in Zagreb" FULL Classical Concert (0) | 2019.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