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그의 반/정지용

헤븐드림 2023. 9. 24. 04:03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중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중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 1」 전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고향」 중
대한민국 시인.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 세례명 프란치스코(方濟角)이다. 국내 모더니즘 시의 선구자로, 후술되어있듯 일각에선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소리도 들을 정도로 한국 문학사에도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1]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 정태국 대까지는 옥천군 군동면 수북리(현 옥천읍 수북리) 화계마을의 연일 정씨 집성촌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정지용이 태어난 후 아버지 정태국은 이후 후실 문화 류씨를 들여 슬하에 남동생 정화용(鄭華溶)과 여동생 한 명을 더 두었다. 출생지인 옥천읍 하계리 39번지에 정지용 생가가 있다.

옥천공립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

청록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2]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정지용은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시단을 대표했던 인물로 꼽힌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개척자 등의 수식도 심심찮게 붙을 정도로 거물로 평가된다. 한국시인협회장이었던 이근배는 "정지용 시인 자체가 그냥 한국 시문학사다라고 할만큼 정지용 시인이 끼친 우리 한국시사, 특히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대 유명시인(청록파 시인 전부 포함)을 발굴하기도 하고 그들(윤동주 등)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주로, 절제된 어조와 이미지즘이 특징으로 꼽힌다.

일제 관련 시 딱 하나를 써서[3] 이것이 친일 문학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시의 어조 자체가 전쟁을 찬양하고 일제를 드높이는 어조인지는 굉장히 모호해서 친일시인지 자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당 시는 타지에서 죽어간 전사자에 대해 절제된 어조로 언급하기는 하나 그 이상의 전쟁과 일제에 대한 찬양이나 영광을 논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지용 시인의 당대 전쟁 관련 작품 자체가 <이토> 딱 한 작품이라 저것을 친일시라고 문제삼는 부류조차도 정지용 자체는 친일 시인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압박에 못 이겨 전쟁 관련 두루뭉술한 작품 하나 내놓고는 붓을 꺾고 협력하지 않은 모양새에 가깝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 정지용 시인 자체가 당시 조선 문학계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위치였어서 감시와 압박이 심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일본 문학계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자국인들에게도 감시가 삼엄했었다. 정지용은 <이토> 이후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해방까지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이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해방 이후에는 친일파에 대해서 꽤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파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분과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문학 외의 글을 투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의 일반적인 문학작품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과격한 어조의 글도 종종 보인다. 이 시절 투고한 글 중에서 일본의 침략자 근성을 비난할때 모모타로를 언급하면서 섬나라 도둑근성 동화라면서 디스하기도 하며[4] 대만 원주민에 대한 기고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이 극렬해지자 월북을 선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전향을 선택,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전향도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던 오제도가 정지용에게 가서 강요로 가입해달라고 재촉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특별시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납북된 것인지 월북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1988년 7.19 해금조치를 통해 그의 시가 해금되기 전까지 정X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재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기사 이 증언은 북한 시인 박산운이 정지용과 함께 납북되던 중 정지용의 최후를 목격했던 소설가 석인해의 이야기를 소개한 회고문을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박산운은 정지용이 자진해서 월북하다가 소요산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정지용이 소요산에서 사망한 것은 맞는 걸로 보이지만 자진월북 운운은 박산운이 정치적 의도에서 포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정지용의 사망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증언이라 보인다. 이 증언이 소개되기 전까진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알려져있었다. 역시 평양 감옥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한 계광순 전 의원(1909~1990, 4, 5, 6대 국회의원 역임)의 증언으로 계광순은 자신은 9월 23일 탈출했지만 정지용은 감옥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한편, 이와 별개로 정지용이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 숙청 혹은 탄광행이 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확실한 최후는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선, 2000년 북에 있던 셋째 아들(정구인)이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상봉대상자에 아버지, 어머니, 형, 조카를 다 넣은 것. 결국 큰 형(정구관)과 상봉했는데,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형에게 북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숙청이나 탄광행이라면 유가족이 이렇게 활동할 리는 없을 거라는 점에서 정지용의 월북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구인은 량강도 방송위원회 중서군 주재원 책임기자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정지용의 사망일자를 9월 25일로 쓰고 있다. 다만 조선대백과사전에선 정지용의 사인에 대해선 밝히지 않고 있다.

자녀로는 3남 1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정구관(鄭求寬)(2004년 4월 24일 별세) 정구익, 정구인, 정구원이다. 연일 정씨 문정공파 족보에는 정구관만 정지용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다. 정구인은 북한에 남았으며 정구익은 한국전쟁 때 병사했다. 장남인 정구관과 딸 정구원은 남한에 남았다.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1988년 해금 조치된 직후 '지용회'를 세우고 정지용의 복권 활동을 행했다. 이 지용회에서 매년 정지용 문학상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