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칼럼

<설교>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

헤븐드림 2022. 10. 1. 06:23

 

본문 말씀 마태복음 4장 1절-11절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1               
은혜와 말씀이란 단어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표현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한국교인들처럼 말씀 듣는 것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성도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드높이거나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는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이 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자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시험들을 이겨야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 우리에게도 승리의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잘 배워서 우리도 주님의 승리에 동참함으로써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1.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3-4)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40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마귀는 예수님의 가장 힘든 점을 건드리며 속삭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얼마나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제의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4). 예수께서는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빵이란 경제적 생존과 여유를 상징합니다. 말씀과 빵이 충돌하지 않는 한은 우리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쫓아가는 것이 빵을 누리는 삶을 위협하기 시작 할 때 위기에 부딪힙니다. 말씀을 버리고 빵을 선택합니다. 이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달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은 달콤하기는 하지만 매우 위험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빵 자체가 악이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빵으로만"이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빵이 꼭 필요한 것임을 전제하셨습니다. 그는 결코 단순한 금욕주의자가 아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와 선택의 문제입니다.

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한다면 그는 육체적으론 살아있기는 하나 더 이상 사람이 아니오 한낱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다운 삶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빵이 충돌하는 순간에 빵을 철저히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려면 이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영국생활을 하는 동안 알게 된 영국인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제가 섬겼던 교회가 속한 교단의 이안 쿠퍼(Ian Cooper) 장로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오스틴 리드(Austin Reed)라고 하는 유명한 양복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에도 세일 기간이 있습니다. 그는 세일의 허구성을 발견했습니다. 20-30% 혹은 30-40%로 세일을 할 때 세일 전 가격을 본래의 가격보다 턱없이 높이 잡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늬만 세일이었습니다. 그는 런던 본점에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항의는 받아드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회사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힘든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정직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과감히 경제적 안정을 포기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잘 알려진 존 스토트(John Stott)입니다. 물론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면이 있기는 했겠지만 세계적 지도자답지 않게 참으로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런던에서 목회 할 때 그 분이 목회 했던 교회의 부속건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일찍이 은퇴하고 그 건물을 개조해서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종의 신앙교육기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교육기관에서 배웠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주 저렴한 학비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웃을 위해서는 늘 풍성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검소한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행복하고 온화한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해맑은 미소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족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이렇게 주님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만들어 가는 사람과 교회가 너무나 적다는 데 있습니다. 이 실패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신앙적 가장입니다. 실상은 여전히 빵의 노예로 살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하죠.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그 심장부가 썩어 있으면서도 생색내기 구제활동으로 감추려는 일부 교회들이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실패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더욱 겸손해지고 주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가장은 우리를 치료불능이라는 구렁으로 빠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이 그 실례입니다. 그들은 소유를 팔아 일부를 챙기고는 그 나머지를 전부인양 베드로에게 가져갔다가 목숨을 잃는 심판을 자초하였습니다. 우리의 실패를 숨기지 않고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승리를 덧입어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삶을 실천해 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6-7)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보시오.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습니다(6). 마귀는 시편 91:11-12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제의가 유혹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7). 예수님은 신 6:16으로 응수하셨습니다. 마귀의 권유는 매우 신앙적으로 들리지만 시 91:11-12의 본래 의도를 뒤틀고 있습니다. 시 91:11-12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오히려 그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이 과연 예수님을 보호할 것인지를 떠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서 경험한 실패를 뒤집으신 것입니다(출17:1-7).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려면 이 주님의 두 번째 승리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굳게 붙들지 않고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이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꽃밭 사이를 사뿐사뿐 거닐 듯 편안하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처럼 그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좁고 험한 길입니다(마 7:13, 14; 마 16:24).

바울 역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습니다(빌 1:29). 그 자신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그가 돌아다니며 제자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행 14:22).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두려워서 그 길을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흔들어 댑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엔 잘 나가다가 그만 중도 하차하거나 다른 길로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약속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고 피부에 와 닿는 힘겨운 역경들이 우리 마음을 쉽게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통치수단으로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그들을 풀무에 집어던져 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 때 이들은 너무나 용감하게 대응하지 않습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확신이 대단합니다. 이어지는 그 다음 말은 더 멋집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와! 대단한 믿음이죠.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에게 연약한 우리 자신을 의탁하고 진실로 그 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세상영화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8-10)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정말 달콤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을 데리고 전망이 확 트인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만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얼마나 달콤한 제의입니까? 하나님을 아주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무도 안 보는 높은 산에서 눈 딱 감고 한번만 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부귀 영화를 예수님의 손아귀에 넣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하시지 않았느냐?"(10, 신 6:13). 예수님은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길은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사로잡혀 살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영화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말씀을 조금만 타협하고 마귀에게 절하면 하나님도 섬기면서 세상영화도 누릴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교회 안이라고 해서 세상영화가 없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교회에 모인 돈과 사람을 움직이는 지위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 마저 끈임 없는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누가 더 크냐는 주도권 쟁탈전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렇게 멍들고 있는 것은 특히 교회지도자들이 교회 안에서 세상영화를 누리려고 암투를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권력 즉 교권을 쥐고 흔들려고 합니다. 교권을 쥐는 방법은 교회를 물량적으로 크게 성장시키든지 아니면 사람과 돈을 용의주도하게 움직일 줄 아는 정치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교권에 관심을 갖다보면 하나님만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마귀와 슬쩍슬쩍 타협을 합니다. 개교회의 급속한 물량적 성장을 꾀하다가 성경을 왜곡시킵니다. 왜곡된 기복신앙을 강조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줌으로 끌어 모읍니다. 그들로 하여금 더 큰 복을 받을 요량에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하고 헌금도 열심히 내게 만듭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재테크를 가르쳐 주는 셈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영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목사들은 말씀과는 상반된 왜곡된 정치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동료 목사들과 선량한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힙니다. 이런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의 도움으로 우리도 세상영화의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마귀를 향해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외쳐야 합니다.
맺음말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와 맞부딪혀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셨습니다. 세상영화를 포기하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기로 하셨습니다. 이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 주님의 승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드높이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은혜로운 곡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조시 그로반(Josh Groban)이 부른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우시니"(You Raise Me Up)입니다. 단순하지만 너무 좋아 그 가사의 일부를 번역해 봅니다. 꼭 한번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우시니,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어요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우시니, 풍랑이 이는 바다도 거닐 수 있어요
당신의 어깨에 기대니 나는 강해져요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우시니, 나의 한계를 뛰어 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