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의 인물

잇사갈/야곱의 아홉번째 아들

헤븐드림 2022. 5. 31. 07:25

 

잇사갈

(Issachar) [그는 삯 [즉 삯으로 얻은 사람]]

1.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레아의 일곱 자녀 가운데 다섯 번째인 아들. 레아는 자기가 임신하지 못하던 기간에 한 하녀가 자기 남편의 아들을 낳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상 또는 삯으로 이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했다.—창 29:32–30:21; 35:23, 26; 대첫 2:1.

잇사갈은 기원전 1761년에 그의 가족이 가나안으로 이주했을 때 아마 여덟 살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그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서 공동으로 참여한 사건들에 관한 기록들이 있을 뿐이다. (창 34:5-7, 13, 27; 37:3-27; 42:1-3; 45:15) 잇사갈은 기원전 1728년에 즉 41세가량 되었을 때, 야곱 집안의 ‘칠십 영혼들’의 일부로서 자기 아들들 돌라, 부와(부아), 요브(야숩), 시므론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했다.—창 46:13, 27; 출 1:1-3; 대첫 7:1.

야곱의 임종 시에, 잇사갈은 그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 번째로 언급되었다. “잇사갈은 뼈가 강한 나귀, 두 개의 안장 자루 사이에 누워 있구나. 그는 그 쉴 곳이 좋고, 그 땅이 즐거운 곳임을 보리라. 그는 자기 어깨를 구부려 무거운 짐을 지고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되리라.” (창 49:14, 15) 야곱이 이 축복을 선언한 것은 잇사갈의 특정한 개인적 특성들과 그의 인생에서 있을 사건들을 지적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에게 내려진 축복들의 경우처럼, 잇사갈의 자손들이 장차 “말일에” 나타내게 될 그 지파의 특질과 행실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창 49:1.

2.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 야곱의 자손들로서 야곱의 아들 잇사갈 계통인 사람들.

이집트를 떠난 뒤에 행해진 첫 번째 인구 조사 때, 이 지파 가운데서 전투를 할 만한 20세 이상의 장정의 수는 5만 4400명이었다. (민 1:17-19, 28, 29) 약 39년 후에 행해진 그와 비슷한 또 한 번의 인구 조사는, 그 지파에서 등록된 사람이 6만 4300명으로 증가했음을 보여 주었으며, 다윗 시대에는 전투 부대가 8만 7000명에 이르렀다. (민 26:23-25; 대첫 7:5) 기원전 1070년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이 지파의 우두머리 200명이 헤브론에 왔다.—대첫 12:23, 32, 38.

광야에서의 대진영의 배치도에서, 잇사갈 가족들은 그들과 친형제 지파인 스불론 가족들과 함께 장막의 동쪽에 유다 지파의 양쪽에 자리 잡았으며(민 2:3-8), 행진할 때는 이 세 지파 부대가 선두에 서도록 정해졌다. (민 10:14-16) 지파들에 대한 모세의 고별 축복에서는 잇사갈과 스불론을 한데 묶었지만(신 33:18), 몇 년 뒤에 지파들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서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낭독하는 것을 듣기 위해 두 집단으로 분리되었을 때는 이 두 지파가 서로 다른 쪽으로 분리되었다.—신 27:11-13; 수 8:33-35. 에발 산 참조.

약속의 땅을 분배할 때, 잇사갈 지파는 제비뽑기를 통해 네 번째로 상속지를 받았는데, 그 땅은 주로 비옥한 이스르엘 골짜기에 있는 땅이었다. 잇사갈 지파의 경계는 북쪽으로는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영토들과, 동쪽으로는 요르단 강과, 남쪽으로는 므낫세 지파의 영토와, 서쪽으로는 아셀 지파에게 할당된 한 부분과 맞닿아 있었다. 스불론 지파와 맞닿아 있는 북쪽 경계를 따라서는 다볼 산이 놓여 있었고, 남서쪽 경계 가까이에는 므깃도 도시가, 남동쪽 경계 방향에는 벳-스안이 있었다. 이 영토 내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도시와 그에 딸린 정착촌들이 많이 있었다. (수 17:10; 19:17-23) 이곳 빼어난 골짜기에서 잇사갈 지파는 모세의 축복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의 ‘천막 안에서 기뻐하였다.’—신 33:18.

야곱의 아들 잇사갈을 “뼈가 강한 나귀”에 비한 것은, 그에게서 나온 지파 속에도 반영되어 있는 한 가지 특성을 지적한 것인 듯하다. (창 49:14, 15) 그들에게 배당된 땅은 실로 “즐거운” 땅이었으며, 팔레스타인 지방의 한 비옥한 부분으로서 경작하기 좋은 땅이었다. 잇사갈 지파는 그러한 일과 관련된 힘든 노동을 잘 받아들인 듯하다. 그가 ‘자기 어깨를 구부려 무거운 짐을 진다’는 말은 자진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지파는 특별히 두드러진 점은 없었지만, 자기 몫인 책임의 짐을 진 일로 칭찬을 받을 만했던 것 같다.

잇사갈의 소유지 내의 어떤 도시들은 이웃 지파인 므낫세에게 속하는 고립 도시들로 지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탁월한 도시들인 므깃도와 벳-스안도 있었다. (수 17:11) 또한 잇사갈 영토 안의 몇 성읍들은 그 주변의 목초지와 함께 레위 지파를 위해 따로 지정되었다. (수 21:6, 28, 29; 대첫 6:62, 71-73) 나중에, 잇사갈은 솔로몬의 궁정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맡은 할당량(연간 필요량의 십이분의 일)을 공급했다.—왕첫 4:1, 7, 17.

잇사갈 지파에서 저명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갈이 있었는데, 그는 이 지파에서 선택된 정탐꾼으로서 다른 정탐꾼들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 사람이다. (민 13:1-3, 7, 31-33) 이 지파의 수장들 가운데, 느다넬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섬겼고(민 1:4, 8; 7:18; 10:15), 발디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민 34:17, 18, 26), 오므리는 다윗 통치 기간에 섬겼다.—대첫 27:18, 22.

잇사갈 지파는 재판관 바락이 시스라가 이끄는 야빈의 군대를 격퇴하였을 때 지원한 사람들 가운데 언급되어 있었다. (판 4:2; 5:15) 나중에, 잇사갈 지파의 돌라는 23년 동안 이스라엘의 재판관 가운데 하나로 일했다. (판 10:1, 2) 단일 왕국이 분열된 후에, 잇사갈 지파의 바아사는 북쪽 왕국의 세 번째 통치자가 되었다. 악인이었던 바아사는 전임자를 살해하고 왕좌를 차지하여 24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왕첫 15:27, 28, 33, 34) 약 200년 후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함께 지키자고 북쪽 왕국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잇사갈 지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나타내어 그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대둘 30:1, 13, 18-20.

에스겔서와 계시록에서, 잇사갈은 다른 지파들과 함께 열거되어 있는데, 그 환상들이 예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거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이 분명하다.—겔 48:25, 26, 33; 계 7:7.

3. 문지기였던 한 레위 사람. 고라 사람 오벳-에돔의 일곱째 아들이다. 잇사갈은 그의 친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신성한 곳의 남쪽 경비 임무를 맡게 되었다.—대첫 26:1-5, 13, 15.

'성경속의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열한번 째 아들 요셉  (0) 2022.06.07
스불론/야곱의 열 번째 아들  (0) 2022.06.04
야곱의 여덟째 아들 아셀  (0) 2022.05.26
갓 /야곱의 일곱번째 아들  (0) 2022.05.22
납달리/야곱의 아들  (0) 2022.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