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수도빈에서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부터 이미 빈에서 날리던 경음악 작곡가였던 탓에 그 가업을 쉽게 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인 요한 1세는 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하는 것을 격하게 반대했고, 장남인 요한 2세의 경우 은행에 취직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다 썼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기초적인 음악 이론이나 바이올린 연습 등 취미삼아 음악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자식들이 이걸로 밥벌이를 하려는 낌새만 보이면 불호령을 내리거나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예로 요한 2세의 경우, 아버지의 눈을 속여 전문가 수준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심하게 맞아 실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곡 주문 받느랴, 무도회장 출연하느라 정신없던 아버지가 아들들이 뭐하는지 일일이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외도하던 여자와 바람을 피운 끝에 가정을 포기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뒤에는 막강한 통제력도 잃었고, 아들들은 거리낌없이 대놓고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뜻을 제일 먼저 거스른 것은 요한 2세였고, 1844년 10월에 빈 근교의 히칭에 있는 유명한 도박장 겸 무도회장이었던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출연했다. 연주곡들도 대부분 직접 작곡한 왈츠나 폴카 등이었는데, 아직 20대도 안된 초짜였음에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요한 2세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부친 덕을 입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일거리 없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각지의 무도회와 여타 공연에 불려다니면서 수백 곡이나 되는 춤곡들을 작곡했고, 아버지의 명성마저 버로우시킬 정도의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로서는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부자 간의 거듭되던 경쟁 끝에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대립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요한 1세 사후에는 아버지의 악단을 자신의 악단에 그대로 흡수해 규모를 더욱 키웠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을 배워왔던 차남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4남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까지 끌어들여 '슈트라우스 형제' 로 빈의 사교계를 석권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달리, 황족이나 귀족들로부터는 '공화주의자' 라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찍혀 궁정무도회 감독 같은 알짜배기 직책을 얻지 못하는 안습 상황이 잠시 있었다. 반대로 요한 1세는 보수적인 황실 지지파였고, 부자간의 대립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도 격하게 진행됐다.
1870년에 동생 요제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도회 출연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자크 오펜바흐가 석권하던 장르인 오페레타의 작곡에 뛰어들었다. 춤곡 대부분이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것과 달리 오페레타는 실패작도 있었고 그저 그렇다는 평을 받은 범작도 있었는데, 성공했던 아니었건 그 오페레타에서 선율을 뽑아 행진곡이나 춤곡 등으로 2차 창작을 하는 식으로 경음악계의 명성을 유지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빈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면서 아버지처럼 해외 순회공연까지 했는데, 폴란드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뿐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가서 공연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60년대에는 황족과 귀족들도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무시못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고, 1863년에 오랫동안 노려왔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에 공화론자였기는 했지만, 높은 지위에 대한 야망도 컸던 인물이었다 결국 자신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정도였던 무시못할 인기를 이용해 황실에 컨택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요한 2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고, 오페레타 '니네타 공비'초연 때는 극장의 특별석에서 관람한 뒤 요한 2세를 불러 직접 축하해주기도 했다.
1899년 폐렴으로 타계할 때까지 18편의 오페레타와 500여 곡의 춤곡/행진곡 등을 남겼는데, 개중에는 바쁜 순회공연 일정 때문에 구작들에서 보충하고 짜깁기하거나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만 출판된 곡들, 다른 작곡가의 소품 편곡 같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후 오스트리아 전체가 국상 분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날카로운 독설 비평으로 유명했던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도, 마치 황제 사후에나 걸맞을 듯한 통절한 추도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고, 묘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금삐까 동상의 폭풍간지로도 유명하다.
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은 당대 유명 작곡가들까지 사로잡았는데, 요하네스 브람스의 경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의 악보를 받아들고는 "불행히도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군요." 라고 할 정도로 춤곡에 특화된 재능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브람스는 수시로 슈트라우스의 집과 휴양지를 방문해 친교를 나누던 사이였다.
브람스와 극점에 서 있었던 리하르트 바그너도 브람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슈트라우스 춤곡의 애호가였고, 바이로이트에 축제극장과 자택을 짓기 위해 땅을 살 때 지주에게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를 들려주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이런 탓에 슈트라우스 생전에 신문 등에 실린 풍자화나 실루엣을 보면, 브람스건 바그너건 브루크너든 대립 파벌을 초월한 당대 유명 작곡가들이 슈트라우스 악단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슈트라우스는 도합 세 번 결혼했는데, 1862년에 맞이한 첫 아내인 헨리에타(애칭 예티) 트레프츠는 연상의 오페라 가수였다. 슈트라우스가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신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부부 금슬도 좋은 편이었지만, 1878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두 번째로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재혼했는데, 이번에는 성격과 나이 차이, 아내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현시창인 생활이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슈트라우스는 교회법에 따라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독일 시민권(정확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시민권)을 얻어 1882년에야 간신히 이혼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이혼 직후 마지막으로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성공적인 결합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아델레의 이름을 딴 왈츠를 써주는 등 애정을 과시했고, 아델레도 남편의 음악 활동에 대한 좋은 조언자이자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무도음악 작곡가라는 직업 때문에 대단한 바람둥이이자 탁월한 댄서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가정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춤곡을 쓰는 작곡가였음에도 춤 실력이 대단히 서툴렀는데, 비만 오면 우울해지는 성격에 주변에서 안좋은 소리만 들어도 창작력이 뚝 떨어지는 등 심약한 면도 있었다고. 음주 문제에 있어서도 꽤 엄격했는데, 슈트라우스 악단 단원이 되려면 반드시 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많은 연주자들이 전전긍긍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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