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독일어: Joseph Anton Bruckner, 1824년 9월 4일 ~ 1896년 10월 11일)

헤븐드림 2021. 6. 29. 21:38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독일어: Joseph Anton Bruckner, 1824년 9월 4일 ~ 1896년 10월 11일)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의 시골 마을 안스펠덴에서 교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을 부모에게 배웠고, 11살 때는 아버지의 사촌에게 통주저음 파이프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술집에서 댄스음악을 연주하다가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는 바람에 안톤이 13살 때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가세가 급히 기울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계 압박을 줄이기 위해 안톤을 린츠 근교의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가톨릭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기숙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3년 동안 수도원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오르간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원장 미하엘 아르네트의 주선으로 린츠의 교원양성학교에서 본격적인 교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린츠의 유력 이론가인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에게 화성학 대위법도 배웠다.

1841년에 1차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보헤미아 근처의 벽촌 빈트하크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턱없이 적은 급료에다가 성격이 괴팍했던 교장이 학교 수업 외에 텃밭의 농사일이나 교회 관리 등 과외 업무까지 떠맡긴 탓에 대단히 힘겨운 일과를 보냈다고 한다. 결국 교장과 언쟁이 빚어지는 바람에 교구 학교들을 장학사 자격으로 시찰하고 있던 수도원장 아르네트로부터 징계성 전근 조치를 받았는데, 말이 징계였지 실제로는 더 좋은 조건과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2번째 부임지인 크론슈토르프에서는 대체로 널럴한 조건으로 교직을 맡았고, 여가 시간에 계속 음악 수업을 받거나 친구들과 조직한 합창단에서 지휘를 맡는 등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1845년에는 2차 교원 임용시험을 통과하고 모교인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수도원에서는 교사 외에 오르가니스트로도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브루크너가 처음 가지게 된 음악가로서의 공식 직함이었다.

1855년에는 당대 음악이론 교육의 1인자였던 지몬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1861년까지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엄격하게 다시 배우면서 완벽한 이론가로 탈바꿈했다. 제히터의 이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보다 10살 어렸던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키츨러가 극장 상연에 열의를 보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키츨러와 공부하던 시기부터 브루크너는 교사 대신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혀 종교음악 외에 피아노곡이나 가곡, 실내악 등 세속음악의 창작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고, 수업 말기에는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 이후 전 생애 동안 창작에 매진하면서 바그너빠의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었는데, 당시 바그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브람스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브루크너가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물론 자작 교향곡이나 여타 작품들의 공연이 계속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적었던 자신감을 더욱 억누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실패는 자작곡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개정판을 낳게 되었다. 오히려 브루크너는 작곡 보다는 오르간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고, 1869년과 1871년에는 각각 프랑스 영국의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할 만큼 본좌급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곡가로서 브루크너가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현악 5중주를 전곡 초연한 1885년에 가서였다. 이어 교향곡 제7번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어 교향곡으로서는 첫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동안 실패했던 작품들도 점차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유명세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으로도 이어졌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고 만년에는 집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었던 탓에 브루크너는 점차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됐고, 1894년 후반에 빈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개최한 이후로는 공적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조차 힘겨워했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벨베데레 궁전의 부속 건물이었던 단층 주택을 새로 제공했다. 창작은 계속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제9번은 3악장까지만 완성되고 4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다(9번 교향곡의 저주). 사후 유해는 유언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대성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3. 창작 성향[편집]

생애 란에 잠깐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척 근면한 성격의 작곡가였다. 중년 이후 평생을 매달린 교향곡의 경우 1곡을 마치고 몇 달만에 다음 곡을 작곡할 정도로 텀이 짧은 편이었을 정도다.

교향곡 외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종교음악에 열의를 보였는데, 다만 교향곡만큼의 집중도는 없었다. 번호 붙은 3곡의 대규모 미사곡도 주로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썼고, 그 이전의 작품들은 별로 언급될 기회가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브루크너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종교음악의 가치를 무턱대고 깎아내린 괴벨스 이하 나치들 마냥 취급해서도 절대 안되는 분야다.

린츠 시절부터 극렬 바그너빠를 자처한 작곡가였지만, 바그너에 대한 관심은 주로 관현악법이나 대담한 화음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였다. 실제로 브루크너는 바그너처럼 오페라를 작곡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바그너 오페라의 줄거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동료 바그너빠들을 뻘쭘하게 만들기도 했다. 뮌헨에서 발퀴레가 초연됐을 때는 공연 모습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된다면서 아예 박스석에서 커튼을 쳐놓고 음악만 듣기도 했다.

다만 바그너에 대한 빠심은 기본적으로 평생을 가도 변함이 없었고, 교향곡 제3번은 아예 바그너에게 헌정한 곡이었다. 교향곡 제7번에서는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바그너 튜바' 라는 금관악기 네 대를 관현악 편성에 추가했고, 이후 9번까지 계속 차용한 바 있다.

11곡의 교향곡은 브루크너 음악의 이해를 위한 필수요소로 버티고 있는데, 동시대 작곡가들과 대등하게 놓고 보기도 곤란하고 낭만주의 사조의 흐름에 놓기도 애매한 탓에 지금도 이런저런 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리를 벽돌 쌓듯이 차곡차곡 올리는 바로크풍 스타일에 오르간의 음향을 종종 모방하기까지 하는 등 아주 독특한 양식을 구축한 탓에, 대중적 호소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 있다.

이런 탓에 브루크너 음악을 좀 더 대중화시키려고 한 후배나 제자들이 바그너풍 사운드로 마구 뜯어고친 악보가 유통됐는데, 여기에 브루크너가 별 저항을 보이지 않은 것도 '브루크너=대책없는 바그너빠' 라는 반대파의 매도에 한몫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소년 시절부터 음악이론을 들입다 판 작곡가답게 복잡한 형식이나 구조를 작품에 도입하고 있어서 많은 지휘자나 연주가들의 머리에 충격을 일으키게 하는데, 다만 무조건 이론에만 치중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중기 이후 교향곡들의 경우 마지막 4악장에서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만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고 있고, 미완성작인 9번 교향곡의 3악장 클라이맥스에서는 무려 일곱 개의 다른 음정들을 한꺼번에 울리게 하는 불협화음 효과까지 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곡가만큼 '반복의 묘미' 를 살린 인물도 없다고 할 정도인데, 한 가지 음형을 내놓으면 곧바로 버리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심할 때는 1분 가량을 그 음형만 계속 반복해가며 음악에 추진력을 싣는데, 아예 '브루크너 시퀀스(동형진행)' 라는 단어가 존재할 정도다. 거의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같은 음형을 최대한 세게 연주하는 물량 공세(튜티)도 가끔 나오는데, 클라이맥스 대목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4분음표 2개와 셋잇단 4분음표 3개로 구성되는 '브루크너 리듬' 이나, 초기 교향곡들인 00, 1, 0번과 중기의 6번 4곡을 제외하면 모든 교향곡이 안개낀 듯한 작은 음량으로 시작하는 '브루크너 오프닝', 잘 나가다가 갑자기 모든 악기가 일제히 쉰 뒤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는 '브루크너 휴지' 도 독특한 기법으로 회자되고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워낙 각각의 규모가 크고 음향이 장중한 탓에 관현악 편성도 무척 크리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악보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00번부터 6번까지는 표준적인 2관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고, 7번에서 바그너 튜바 4대가 추가되면서야 편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8번에서는 3관 편성으로 목관악기 숫자가 늘고 하프가 더해졌고,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이 3악장 클라이맥스에서 연주된다.  특히 금관악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말러보다 편성은 작지만 오히려 더 장대한 음향을 낸다.

특히 금관악기의 역할 때문에 이러한 인상이 강한데, 실제 연주에서도 금관악기 연주자들의 실수음이 가장 두드러지게 오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브루크너 음악이기도 하다. 오르간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사운드를 모방하기 위해 금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교향곡 제5번의 마지막 대목에서 이러한 용법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극렬 개정 매니아

브루크너 만큼 자작곡을 미친듯이 뜯어고친 작곡가도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인데, 실제로 그가 남긴 곡들 중 개정을 거치지 않은 곡들이 별로 없을 정도다. 교향곡의 경우에도 아직 00번이나 0번, 중기의 이색작인 6번 등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두세 개의 버전이 있는데, 그것도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품의 공연과 출판이 매우 어려웠던 현실에 기인했다. 브루크너는 1868년 빈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시작했으나 브람스와 한슬릭 등 브람스파의 집중 견제로 초연과 출판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향곡 3번이었다. 사실 브루크너는 교향곡 3번 이전에는 그다지 개정을 하지 않았었다.

브루크너는 1873년 교향곡 3번을 완성하고 초연을 위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교섭에 들어갔으나 가까스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최초의 리허설 후 곧바로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후 브루크너는 빈 필과 주변의 지적 상황을 반영하여 작품을 개정하여 다시 빈 필과의 연습에 들어갔고 빈 필은 또다시 퇴짜를 놓았다. 그러면 브루크너는 또다시 개작에 들어갔다. 교향곡 3번은 초연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을 몇차례나 반복했다. 결국 빈 필과 최초로 리허설을 한지 무려 3년반만인 1877년말에야 가까스로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파의 방해 속에 가까스로 진행된 이 초연은 엄청난 대실패를 겪었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초연하기 전에도 지휘자나 악단과 연습이나 시연 혹은 악보만 보여줬을 때 뭔가 비판을 받았다면 즉시 뜯어고칠 태세를 갖췄을 정도다. 브루크너의 소심한 성격으로서는, 크던 작건 자작에 행해지는 비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크너를 위시한 바그너빠를 인정사정 없이 악평하기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같은 이들의 날선 혹평도 이런 개정 작업이 계속되는데 일조했지만, 때로는 자신이 신임하고 있던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개정을 하는 안습 상황도 있었다. 특히 교향곡 제8번의 경우, 초연을 부탁한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가 곡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하며 공연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자살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브람스파의 방해로 출판조차 어려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음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의견을 대폭 반영하여 수정한 후 출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개정을 거친 곡들은 대개 원숙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에, 브루크너의 개정 작업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좀 더 많다고 평가된다. 많은 지휘자들이나 관현악단들이 최종적으로 개정된 악보를 사용해 연주와 녹음을 하고 있다. 특히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향곡 4번, 8번은 개정작업으로 인해 작품이 크게 개선, 향상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정작업이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어서, 곡에 따라 판본 간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1번, 3번 교향곡이 그런 경우인데, 1번의 경우 말년(1891년)에 행한 개정이 오히려 곡의 개성을 죽였다는 견해가 있어 개정 이전의 1877년 판본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그러나 만년에 개작한 판본의 원숙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그너 작품의 악상 인용과 헌정 시도, 초연의 대실패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3번의 경우, 판본 문제가 가장 복잡하다. 크게 3가지 판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년에 개작한 1890년판이 많이 연주되고 있지만 그 이전의 1877년판을 선호하는 지휘자도 적지 않다. 여기에 미개정판인 1873년판이 1970년대에 출판된 이후 이 판본에 대한 지지도 크게 늘었다. 3번 교향곡은 개정을 거치면서 관현악법이나 전개가 자연스러워지고 원숙해진 점도 있지만, 청중의 반응을 고려하여 2악장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삭제가 이루어져 작곡가가 의도한 원래 아이디어와 작품의 아름다움이 크게 훼손된 안타까운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교향곡 제9번도 이런 개정 작업에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