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산 돌과 하나님의 백성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그리스도의 고난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본문 강해
[1-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키며,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마음 속에는 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깎아 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게,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이런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이러한 죄성들이 남아 있고 그들도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들은 배가 고플 때 엄마의 젖을 먹고싶어 운다. 아기는 몸이 안 좋으면 젖을 안 먹으려 하지만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원어(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는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그것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말한 것은 이단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흥미 위주의 말들과 구별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하며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하였다(엡 4:13-16). 히브리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했다(히 5:13-14). 우리는 주 안에서 순수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자라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딤후 3:16-17).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있으나 전통사본들에는 없다.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은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 거듭남)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칭의는 법적인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성화(聖化)는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다. 이것은 성도가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그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재의 삶에서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과 의와 선과 진실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이것은 우리가 순수한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인격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단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벧전 1:5).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는 확실한 미래를 가리킨다. 예정하신 자들은 다 중생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 법적인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영화에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한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자비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옛사람에 속한 모든 종류의 악독과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등 악들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하자. 우리는 헛된 세상 이야기들을 버리고 성화의 힘이 되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하고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자라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이루어진다.
4-10절,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4-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배척과 버림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인류의 구속자(救贖者)로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구주이심을 뜻한다고 본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약성도들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은 성도들이 모여 건립되는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된다. ‘신령한’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지 물질적 건물이나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그들의 연합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교회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하여 벽돌 한 장이 쌓여 가는 이 건축은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 배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유여하지 못해도,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와 성화의 일을 크게 여기고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신약교회라는 이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영적인 제사란 우리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한다.
[6-8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이 세상에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은 없고 더 귀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은 영생에 이르게,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 받을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10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사랑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참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특권이 있다(히 10:19).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들은 죄와 불의와 불법이 가득하며 우상숭배적이요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경건과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안의 나라이다. 성도들이 그 나라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보배들이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은 아무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귀한 특권을 가지는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허무와 불행과 영원한 죽음 아래 살았던 우리가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이한 은혜와 사랑,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을 마땅히 찬송하며 말과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으나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말과 행위로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우신 산 돌이시다. 그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돌이시다. 그것은 다니엘이 본 바 세상 나라들을 부서뜨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돌이다(단 2:34-35, 44). 예수께서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1:42-44). 오늘날도 주께서는 영생의 구원의 일을 하신다.
둘째로,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권 있는 백성이 되었다.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큰 은혜를 감사하며 이 특권을 누리며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며(롬 12:1)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야 하고, 또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한다.
11-25절, 선한 사람이 되자
[11-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욕망들]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모든 영혼은 죽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판단을 받아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장차 부활할 몸이 들어가는 천국과 지옥과는 구별된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내세를 준비한다. 구원은 꼭 받아야 하며 성화도 중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을 거스르는 몸의 욕망들을 제어해야 한다. 그들은 교만과 미움과 음란과 거짓 등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몸과 영 혹은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영과 영혼은 한 실체에 대한 다른 두 용어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세 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과 전통적 개혁신학에 맞지 않는다. 성경에서 영 혹은 혼이라는 말은 분명히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 몸은 물질적 실체이며 거기에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없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영의 활동이다.
중생한 영 혹은 영혼은 범죄하는가? 중생한 영이 몸과 분리된 상태 즉 죽을 때에는 즉시 천국에 올라가며 그렇다면 그 영은 죄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살아 있는 동안 범죄한다. 그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죄이며 그것은 다 영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비록 그 자체로는 죄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몸과 결합되어 있는 동안 한 인격체로 죄를 짓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죄성은 사람의 영과 몸 중 어디에 자리를 하는가? 죄성은 사람의 몸에 자리를 하며 그러므로 성도가 죽으면 그 영은 즉시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몸에 죄성이 있다고 해서 몸을 죄악시하거나 천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화의 이치는 무엇인가? 성화는 중생한 영이 몸의 죄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개혁신학은 중생 즉 거듭남을,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서 그 ‘지배적 성향’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범죄할 수 없는 성향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몸에 남은 죄성을 이기기 어렵다. 여기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속에 몸의 남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이룬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몸의 죄성]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들은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삶으로써 그들에게 바르고 선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물론,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부당하게 비방하는 일이 적지 않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려 할 때,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거짓으로 교묘히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그러나 느헤미야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충성된 종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이 되어 선을 행함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날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
[13-15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디아 톤 퀴리온)[주님 때문에]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이는 너희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는 것이라[것이 하나님의 뜻임이니라](원문, KJV, NASB, NIV).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데서, 예컨대, 옛날에는 왕과 방백들에게, 오늘날에는 나라의 통치자들과 나라의 법에 순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는 주의 이름 때문에 또 세속 사회 즉 국가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고 말했다(1-2, 4, 6절).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들은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거짓말로도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지만, 성도들은 범사에 선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비난할 아무런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선해야 하고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한다.
[16-17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존중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의 진리이며 갈라디아서의 중심 진리이기도 하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성도의 선한 삶은 모든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특히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위정자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이웃의 노인들과 교회의 노인들, 학교의 선생님들, 직장의 상사들, 나라의 대통령을 존경해야 함을 포함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8-20절] 사환들(오이케타이)[집안의 종들]아, 범사에[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친절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이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원문, KJV, NASB)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을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는 교훈이다. 또 종들은 선하고 친절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종이 어떤 잘못을 행하여 주인에게 지적을 받고 책망을 듣고 심지어 매를 맞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므로 그때 참는 것은 칭찬할 일이 못된다.
그러나 그가 선하게 행하는 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그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한 양심 때문에’라는 뜻이라고 본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억하실 것이다.
[21-25절] [이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우리를]3)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전통사본)4)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는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각오해야 할 삶이다.
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죄라는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과 같았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와 간섭, 그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11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구원받은 자인 우리의 말과 행동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경건하고 선한 말과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님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 사회, 즉 우리나라의 통치자들과 관리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런 고난을 당하셨고 길 잃은 양 같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까다로운 윗사람에게도 순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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