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왕(기원전 735~기원전 727)은 요담의 아들(왕하 16:2)로서 20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중략)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왕하 16:3).
기원전 727년경 아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이 죽은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다 아하스왕이 죽고, 뒤를 이어 히스기야가 왕이 됩니다(왕하 16:20). 열왕기하는 18장 2절에서 히스기야 어머니 아비(Abijah)를 '스가랴의 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왕 스가랴(기원전 748~기원전 747)와 같은 인물이라면 두 왕국 사이에 통혼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연대에는 논란이 많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 25세였고,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36세에 죽었습니다(왕하 16:2; 18:2). 생물학적으로 아하스가 11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히스기야는 첫아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마 아하스가 (첫)아들을 번제로 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왕하 16:3).
히스기야는 병에 걸렸다가 15년을 더 살았으며(왕하 20:6; 사 38:5), 이 이야기가 산헤립 침공(기원전 701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기원전 701년 이후로 15년을 더 통치하게 됩니다. 결국 히스기야 통치 기간을 기원전 700년 훨씬 뒤로 잡아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확고한 대조 연대표로 보이는 히스기야 14년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했다고 기록된 열왕기하 18장 13절의 내용조차 의심스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생명이 15년 연장되리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건이 산헤립 침공 때 일어났다고 하고, 히스기야가 29년을 다스렸다고 적혀 있어(대하 29:1), 열왕기하 편집자들은 단순하게 계산해(29-15=14) 산헤립 침공이 히스기야 재위 14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외에 산헤립 침략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
히스기야는 남유다 여호와 신앙의 방향을 결정할 종교 개혁을 도입합니다.
열왕기하 18장 1-8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산당을 제거합니다. 주상을 무너뜨리고 신성한 기둥(아세라)를 찍고, 모세가 만든 놋뱀 느후스단(Nehushtan, 민 21:9)을 부숩니다. 느후스단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집트의 부적처럼 보호용으로 사용되었으리라 보이는 이것을 파괴했다는 점은 이집트 상징주의를 완전히 파괴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런데 파괴한 것들 중 아시리아 종교와 직접 관련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을 아시리아의 침략과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이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관련해서 히스기야는 분명히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 통치 원년에 성전 정화를 시작했다고 언급합니다(대하 29:3). 이는 오랫동안 아시리아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이스라엘 정세를 고려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시리아에 저항할 수 없어, 첫 20년은 충성스러운 봉신으로 섬겨야 했지만 종교적으로는 새로운 기운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을 대대적으로 정화하고 예배를 재정비합니다. 히스기야는 북부 지파들을 포함해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온 이스라엘을 초대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킵니다(대하 30장).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킨 뒤 백성들은 모두 돌아가서 지방 산당들과 이방 제단들을 제거합니다.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대하 31:1)."
히스기야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서열을 정하고, 서열에 따라 직임과 제사를 행하게 합니다. 십일조와 각종 소산을 백성들이 많이 가져와서 히스기야는 많은 저장소와 여러 책임자를 두어야 할 정도였습니다(대하 31:2-21).
이후 아시리아 산헤립이 침략했으나 히스기야의 지도력과 선지자 이사야의 도움, 백성들의 노력으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대하 32:1-23). 이후 히스기야는 교만해져 병에 걸리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15년을 더 살게 됩니다(왕하 20:6; 사 38:5; 대하 32:24-26).
히스기야를 향한 평가는 전무후무한 칭찬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왕하 18:5)."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관한 흔적을 라기스에서 찾았습니다. 라기스는 기원전 10세기부터 바벨론에 파괴되는 586년까지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을 발굴한 결과, 불타는 진흙 벽돌, 화산재, 그을음, 깨진 도기 및 수십 개의 화살촉이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발견했습니다.
뿔이 있는 두 개의 제단 가운데 하나는 예리한 물체로 의도적으로 끊어졌고 다른 하나는 보존되었습니다. 이는 열왕기하 18장 4절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뿔이 잘린 제단 말고 화장실 용도로 쓰인 구멍이 뚫린 돌 받침도 발굴되었습니다. 제단의 뿔을 의도적으로 잘라 버리고 화장실을 서쪽에 놓아 의식적으로 불순물이 되게 하고, 그 장소가 더 이상 제식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후왕이 바알 산당을 파괴하고 화장실로 만든 흔적일 수 있습니다.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왕하 10:27)."
- 실로암 명문(Siloam tunnel inscription)
히스기야는 산헤립 침략 때 단단한 바위를 뚫어 520미터 되는 터널을 만들어,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왕상 1:33)의 물을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끌어왔습니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하 20:20)."
식수 공급원인 기혼 샘(Gihon Spring)은 성 바깥 기드론 계곡의 취약한 지점에 놓여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혼과 다른 식수 공급원을 막은 뒤(대하 32:2-5), 터널을 파서 물을 언덕 아래로 돌려 도시 서부 성벽 안 집수 웅덩이로 모았는데(왕하 20:20; 대하 32:30) 이 터널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1880년 터널에서 발견된 실로암 터널 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터널이 뚫리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채석공들은 서로 반대쪽에서 계속 곡괭이로 파고 들어갔는데 한 규빗 정도가 그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었을 때 서로 반대쪽에 있던 인부들끼리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바로 이날 터널이 완전히 뚫리게 되었던 것이다."
- 히브리어 명문과 인장
방대한 자료를 구성하는 lmlk('왕에게 속한') 항아리 손잡이들에서 지도급 인사들의 수많은 개인 인장과 날인 흔적에 히스기야의 크고 작은 히브리어 명문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극적인 것은 2009년 발견하고 2016년 분석이 끝나 발표한 히스기야왕의 인장 날인 점토입니다. 여기에는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의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발굴팀장 에이라트 마자르(Eilat Mazar)는 "왕의 인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 라기스
산헤립은 라기스를 공격합니다(왕하 18:14-17, 대하 32:9). 심지어 산헤립이 전투를 참관하고 미술가가 전투를 생생하게 스케치했을 것이 분명한 언덕 꼭대기 가장 전망 좋은 장소도 발굴되었습니다. 이중으로 된 성벽도 있습니다. 복잡한 공성 무기들, 철로 된 수백 개의 화살촉과 돌로 된 투석기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성 안쪽으로 경사로에 대처할 수 있는 기구가 있는데, 파괴된 성문은 높이가 2미터에 이를 정도입니다. 성벽에서 출토한 거대한 둥근 돌은 불을 붙여 경사면을 따라 굴리는 용도였습니다. 성을 함락하면서 생긴 유골 1500여 구도 발굴되었습니다. 잘 보존된 아시리아 양식의 투구도 있고, 아시리아인들이 식용했던 돼지 뼈들의 지층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성서에서는 예루살렘이 산헤립의 포위 공격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가 아시리아 진중에 역병을 보내 군대를 멸절했고(열왕기하 19장 35절은 18만 5000명이 죽었다고 자세히 기록), 그 결과 패퇴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따르면, 불경한 산헤립은 비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리아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신 니스록(Nisroch)의 신전에서 예배하는 중에 자신의 친아들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강력한 아시리아 군대와 그들의 신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입니다. 위협당한 유다의 다른 지역들 중에서, 오직 라기스와 립나만이 언급되었을 뿐이고, 기껏해야 지나가는 정도로만 간단히 언급되었습니다.
이 원정은 의심할 바 없이 8세기 후반 유다 왕국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라기스는 유다의 모든 성채 중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로 여겨지는 곳으로 포위를 당했다(왕하 18:17-18) △예루살렘 역시 포위를 당했고 산헤립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성은 정복되지 못했다 △아시리아인들은 퇴각했고 얼마 후 산헤립은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아들 에살핫돈(기원전 681~기원전 669)이 왕위를 이었다.
- 아시리아 기록
산헤립의 연대기 사본 가운데 팔레스타인 원정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테일러 프리즘과 시카고 프리즘입니다. 두 프리즘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아시리아 기록물은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관련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산헤립의 라삼 기둥 비문).
"유다 사람 히스기야는 내 멍에를 매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도시 46개 곧 성벽이 있는 요새를 포위했고 (중략) 포로 20만 150명, 말, 노새, 낙타 등을 전리품으로 삼았다. (중략) 내가 그를 죄수로 선포하고 그의 수도 예루살렘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가두었다. (하략)"
이런 글도 있습니다(산헤립의 라삼 기둥 비문).
"히스기야는 내 주권의 어마어마한 위대함에 압도되어 내가 나의 수도인 니느웨로 떠난 뒤에 예루살렘을 강화하기 위해 모았던 정예부대와 최고의 군사들과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정선한 안티몬(보석), 커다란 덩어리의 홍옥수, 상아를 입힌 침대들 (중략) 셀 수 없이 많은 장식들, 포위 공격용 방패들 (중략) 그의 딸들과 그의 궁녀들, 그의 남, 여 가수들도 함께 보냈다. (하략)"
또한 아시리아의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비록 성서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즉각적 보복(왕하 19:36-37; 사 37:37-38)으로 죽지 않고, 20년 후(약 681년)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 또한 여호와의 보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 이사야 인장?
선지자 이사야 것으로 보이는 인장도 2018년 발견되었습니다.
점토판에 찍힌 인장에는 고대 히브리어가 적혀 있습니다. 오래되어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선지자 이사야에게 (속한)'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지자'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아, 히스기야왕의 관원 중 한 사람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점토판이 히스기야왕의 인장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발굴된 점, 히스기야왕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궁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 등은 이사야 선지자의 인장일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히스기야의 업적
히스기야의 업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종교 개혁입니다. 수많은 아세라 목상, 놋뱀 등 우상들을 부수고 산당들을 제거하는 강력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의 위기 원인이 여호와 신앙이 타락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히스기야는 선왕先王 아하스와 달리 아시리아의 침략에 대항해 이겨 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군사 침략을 막아 낸다는 것은 남유다 입장에서는 참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전략적으로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산헤립에게 예물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왕하 18:14). 하지만 결국 아시리아는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해 왔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이들은 아시리아의 신 아슈르를 여호와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왕하 18:33-34)."
히스기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지자 이사야에게 예언을 구합니다. 결국 산헤립은 니느웨에 돌아가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왕하 18:37).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열쇠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왕하 18:17-37)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왕의 신앙, 여호와의 간섭과 도우심이 없었다면 예루살렘도 사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패망의 길을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뜻을 따랐다는 것은, 바로 아시리아의 군사 침략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이 여호와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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