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로베르트 슈만

헤븐드림 2021. 3. 5. 04:21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독일 출판업자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856 7월 29일 정신병원에서 46세로 숨진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그는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문학적인 교양을 쌓았으며 11세에 합창곡과 오케스트라 곡을 쓸 만큼 조숙한 음악적인 재질을 보였다. 

16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희망으로 법률을 전공했지만 음악으로 전향해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음악비평을 병행하여, 1834년부터 음악신보를 주관하였다. 그는 약 10년간 낭만주의음악을 계몽했으며 1831년 쇼팽을 절찬했고, 1853년 브람스를 소개한 논문은 유명하다.      

교향악이라는 형식이 전기고전파의 태동기에 하이든.모차르트를 거쳐서 베토벤에 이르러 확고한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이 같은 교향악의 성장은 일직선적인 성장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의 위대한 활동 이후에 교향악은 분화의 길로 나가게 된다. 베토벤 이후의 독일계열 교향곡작품을 보면 브람스는 베토벤의 이념을 계승했지만 연대적으로는 반세기가 지난 일이었다.    

슈만이 남긴 4편의 교향곡은 시대적으로 브람스와 동일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시적인 서정성에 치우쳐서 베토벤의 교향곡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슈만은 처음에 피아니스트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피아노 수련과 함께 피아노 곡만을 써서 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지나친 피아노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고 작곡에 전념하였다. 

 

 



1840년 피아노 스승인 뷔크의 딸 클라라를 소송으로 빼앗다시피 한 그는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4개월만에 교향곡 제1번을 작곡했는데 봄과 같은 정서가 넘쳐서 「봄의 교향곡」이라 하였다. 그리고 클라라와 4년간의 열애(熱愛)중에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포함한 130편 가까운 가곡을 작곡하여 「노래의 해」라 불리는 가곡의 명작을 남겼다. 그리고 결혼에 성공한 슈만은 기쁘고 즐거운 정서를 가득 담아 교향곡 작곡에 열중했으며, 이어서 실내악곡.합창곡으로 등으로 작곡에 대한 흥미는 다양하게 옮아갔다. 그러나 40세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정신병의 징후는 1854년 2월 17일 「나일강 투신사살」사건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46세를 일기로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마친 불우한 작곡가였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 후, 1842년에 세 편의 현악4중주곡을 비롯한 실내악의 걸작을 작곡했다. 빈을 방문했을 때, 베토벤의 묘 위에서 펜을 발견하고 이 펜을 사용하여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에 관한 각서(覺書)를 쓰고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의 스코어를 이 펜을 사용하여 쓴 것은 독일 교향곡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슈만의 의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슈만은 4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러나 발표연대에서 제4번이 처음으로 구상된 작품이다. 슈만의 음악적인 경력을 살펴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작품이 빛을 잃고 산만해져 갔으며, 가곡에 있어서도 「시인의 사랑」이후에는 평범한 작품만이 작곡되었는데, 이는 시인적인 영감이 폭발할 때만이 명작을 일구어내는 기질의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향곡 제1번을 작곡하기 2년 전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 내가 출판하고 싶고 또 들려주고 싶은 것은 교향곡뿐입니다. 나는 가끔 피아노를 부셔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 사상을 말하기에는 피아노가 너무 좁습니다 -

교향곡 제1번을 작곡하기 시작해서 4일만에 피아노 스케치를 끝낸 그는 1810년 3월 31일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을 하였다. 멘델스존과 슈만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사이이다. 

1843년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창설하고 슈만을 작곡과 피아노 및 스코어 리딩의 교수로 초빙했는데, 이 학교는 19세기를 통하여 유럽에 있어서 음악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음악학교 내지 대학의 전형(典型)으로 된 학교이다. 

여기서 슈만의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 이 교향곡은 나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대작을 이렇게 빠른 시일에 완성시키신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 

이 글에서 슈만은 작곡가로서 시인의 시상(詩想)과 같은 영감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관현악 용법에서 트롬본의 역할을 증대시킨 것은 낭만파 관현악발전의 징후의 하나로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교향곡의 첫 작품이 작가의 대표작이 된 예도 슈만 외에는 없다는 것을 부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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