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투 DB(신미식 작가)
크리스찬북뉴스 칼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1.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입니다. 지난해는 코로나와의 싸움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유별난 해였기에, 성탄절은 물론이고 송구영신예배조차 비대면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라도 어느 때보다 고요한 성탄절이었을 것이고, 마치 1년 운세를 확인하는 듯한 말씀 뽑기와 같은 순서도 생략했을 것입니다.1.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입니다. 지난해는 코로나와의 싸움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날, 새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우리가 만약 실패와 실수가 없는 단순히 좋은 것만을 기대하고 잘되기만을 바란다면, 불행을 자초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 없는 성공과 번영만을 원하고 기도하고 간증한다면, 그것은 무속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2.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이 땅에서 어떻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신 내용이 레위기입니다.
우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게 산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레위기에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과 상세한 법조문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그럼 이 조항들을 유념하여 잘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걸까요?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 규례들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완벽에 가까운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면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규례를 지킴으로써 ‘성결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이 되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결하게 살아감으로 저들에게 본을 보이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 예수님이 보이신 거룩은 매우 이상한 방식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은 희생제사의 제물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거룩과 어린 양, 이 둘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2세기 중엽 순교자 저스틴이 쓴 그의 제일 변증서(The First Apology)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라를 달리하는 것도, 언어를 달리 하는 것도, 의복을 달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도시에 사는 것도 아니며, 어떤 특수한 언어를 쓰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 혹은 다른 도시에 흩어져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며 여느 사람들처럼 육신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이 같은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였습니다.
4. 서기 165년 끔찍한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이후 15년 동안 제국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사망했고, 황제도 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 251년에도 동일한 파괴력을 가진 전염병이 다시 제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시기는 기독교 인구가 폭발적으로 확산했던 시기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역병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마다, 기독교 공동체는 병자와 죽어가는 자를 간호했으며,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편지에서, “기독교의 성장은 ‘기독교인의 도덕성’과 ‘나그네에 대한 너그러움과 죽은 자의 무덤을 잘 관리’하는데 있었다, 우리들이 기독교인의 미덕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5. 지금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 있지만 처음 기독교와는 정반대의 양상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에서 다른지, 새해에는 구별해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를 못하게 한다고 어깃장을 놓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다른 겁니다. 그게 거룩한 겁니다.
주일예배를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하자는 짓을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기독교의 결론이 세상으로 나 있다면,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근본적 타락은 ‘더러워지고 추해졌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들이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6. 기독교가 불쌍하지 않은 이유는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지 적게 모이는지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에 근본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0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 11-18장은 ‘우리 자신의 거룩’, 그리고 19장에서 마지막 27장은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거룩’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은 ‘예배’로, 우리 자신에 대한 거룩은 ‘성결한 삶’으로, 그리고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거룩은 ‘사회적 책임’이 그것입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조금 더 거룩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올해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손이 되어, 여러분들의 소박한 일상이 거룩으로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성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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