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책읽기

목신의 오후/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헤븐드림 2010. 1. 14. 04:54

 

 

 

 

 

목신의 오후(세계시인선 016) 

 

 

 

 

 

 

 

 

 

바다의 미풍

 

육체는 슬프다, 아!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도망치자! 저 머얼리로 도망치자! 나는 느낀다 새들이
미지의 물거품과 하늘 사이에 취해 있음을!
아무것도, 눈에 비친 옛 정원도
오 밤이여! 백색이 방어해 주는 텅빈 종이 위의
내 램프의 쓸쓸한 빛도,
애기에게 젖먹이는 젊은 여인도.
이 바다에 젖은 마음을 억누르지는 못하리라
나는 떠나리라! 돛대를 흔드는 증기선이여,
이국적인 풍경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인한 희망으로 슬퍼진 권태는
여전히 손수건의 마지막 작별을 믿는다!
그리고, 어쩌면 돛대는 폭풍우를 초래하여
바람이 파선한 배위로 굽어보는
그 돛대들 사이에 있으이라, 돛대도 없이, 비옥한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수부들의 노래에 귀를 귀울여라!

 
     
     
     
  순결하며 발랄하며 아름다운 오늘이...

 

순결하며 발랄하며 아름다운 오늘이
우리를 위해 술취한 날개로 갈겨줄 것인가
날지못한 비상의 투명한 영하가
서리밑에서 갇혀있는 잊혀진 얼음 언 호수를!

지난날의 백조는 상기한다.
불모한 겨울의 ?태가 빛났을 때
그가 살수 있는 땅을 노래하지 않았기에,
장렬했으나 희망없이 해방되려했던 자신을.

온 그의 목은 뿌리쳐 버리리라
그의 깃이 붙잡힌 대지의 공포가 아니라,
공간이 그것을 부인한 새에게 과한 이 하얀 고통을.

이곳에 그의 순수한 광휘가 운명지어 준 환영이여,
백조는 꼼짝도 않는다, 무익한 유형에서 그가 입은 
경멸의 차디찬 꿈을 꾸며.

 
     
 

 

 
   
 

 

 

 

 

 

스테판 말라르메 Stephane Mallarme (1842-1898)는 문학 사조에서 상징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상징주의적인 시를 썼다기보다는 순수시, 시의 이상적 형태를 위해 일생 생각하고 찾고 쓴, 시의 수도사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적으로 많지 않은 시는 난해라는 장애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추앙자를 냈다.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된 지금에도 계속 많은 추종자들이 배출되어 그의 작품을 연구, 해석하고 그의 교리에 따라 시를 짓고 있다.

말라르메는 파리 태생으로 하급 공무원 가정 출신이다. 5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재혼하여 일종의 고아와 같은 처지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손 아래서 자라났다. 학교 시절부터 심약한 그는 고독했으며 야유하는 동료들을 피하여 혼자 몽상과 노트에 시를 쓰는 것을 즐겼다.

성인이 된 말라르메는 시골 중학교의 영어 교사가 되어 이후 일생 동안 계속 주로 지방 중고등학교의 영어 교사로 빛 없는 평범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교사관 직은 생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참다운 생은 시에 대한 사색과 탐구와 각고로 일관했다.

그가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경부터인데 때때로 산문시나 소네트를 문학 잡지 등에 기고했다. 1866년에 <현대 파르나스파>라는 문학지에 10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창문', '창공', '바다의 미풍' 등이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이것은 그의 20대 때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온 정력을 다 쏟아 쓴 독창적인 시는 시극 '에로디아드'와 '목신의 오후'다. 이 두 편의 시는 그가 오랜 시일에 걸쳐 갈고 다듬은 것으로 특이한 사상과 정밀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 번째 작품은 후일 드뷔시가 같은 이름의 교향시 서곡을 써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극히 난해하여 전체적인 이해와 통일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난해성과 과작으로 인하여 그는 188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그의 작품은 경원시되어 왔다.

   그의 유명한 '목신의 오후'는 원래 <파르나스 시집> 제3집에 싣기로 되어 있었으나 심사 위원회에서 부력되어 게재되지 못했다. 온화하고 누구에게도 친밀한 그도 이 일에는 격분하여 반대의 주동자 아나톨 프랑스에게 일생 원한을 가졌다 한다.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그를 추앙했고 말라르메 자신 또한 대중적 명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4년 베를렌이 그의 시인론 <저주받은 시인들> 가운데 말라르메의 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게재했고, 같은 해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 말라르메의 시 '에로디아드'에 압도되었다는 대목이 널리 전파되어 그의 이름이 갑자기 유명해지고 이어서 젊은 상징파 시인들이 그를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1871년 가을 파리로 올라와 계속 영어 교사로 지내면서 로마 가의 작은 아파트에서 '화요회'를 주재했다. 그의 탁월하고 깊이 있는 시와 예술론에 힘입어 1880년대에는 당시의 유명한 시인과 문인 라포르그, 레니에, 바레스, 클로델, 지드, 발레리 등이 참석, 경청하여 그의 작품 못지않게 시단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이름을 높이었다.

그가 파리에 정주한 시기는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로 창작에서도 일종의 휴식 시기였다. 생활을 위해서인지 <영어 단어집>, <영어의 아름다움> 등의 어학 서적과 그리스 신화의 해설판인 <고대의 신들>을 출판했고, '최신 유행'이라는 유행 잡지의 편집을 맡는 등 상당히 세속적인 문필 활동도 했다.

그러나 말라르메가 또다시 난해무쌍한 장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85년 '데 제생트를 위한 산문'을 발표한 이후다. 데 제생트란 앞서 나온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다. 이 시는 시인을 위한, 시인의 이상을 노래한 시의 본보기라고 하나 이 시의 해석은 난사 중의 난사로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상징주의자와 그의 주석자들에게는 일종의 경서가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산문이나 소네트 형식으로 시인의 입장과 사명감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 시를 많이 지었고 또한 보들레르, 베를렌 등의 시인, 비그너, 샤반과 같은 예술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항해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그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의 이름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퍼지고 그의 작품도 각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그의 화요회는 유럽의 가장 유명한 문인 인사들이 참가하는 모임이 되었고 1896년에는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베를렌에 뒤이어 시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방랑가인 베를렌이나 반항아인 랭보와는 벙반대의 성품으로 우아하고 절제 있고 다른 불행한 시인들을 따뜻하게 돌봐주는 인정 있고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시론에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97년 1월, 그의 예술론인 <여담>과 같은 해 5월에 국제적인 잡지 <코스모폴리스>에 시 '한 번의주사위가 우연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가 발표되어 소수의 동조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음 해 9월 8일, 파리 근교 발방에 있는 시골집 서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후두 경련을 일으켜 다음 날 아침 절명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