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책읽기

김훈의 '바다의 기별' 산문집

헤븐드림 2009. 12. 5. 02:42


바다의 기별(김훈, 생각의 나무)


─ 김훈은 김훈이다


 김훈의 에세이 『바다의 기별』이 나왔다. 김훈은 단편 「화장」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장편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지만, 에세이 『자전거 여행』 등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린 작가이다. 김훈의 글을 볼 때마다 항상 그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에 압도당하곤 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훈의 『바다의 기별』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그의 문장이 곧 김훈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훈은 그가 쓴 수사 없는 스트레이트한 문체 같이 느껴진다. 단순하지만 더욱 옹골차고 깊은 문장들 사이에서 김훈의 생각과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책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13쪽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14쪽


  칼로 친 듯한 김훈의 문장들은 반갑기까지 하다. 처음에 실린 ‘바다의 기별’은 정갈한 문체로 쓰인 사유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두 번째에 실린 ‘광야를 달리는 말’은 김훈의 아버지에 대해서 쓰여 있다. 무협 소설을 적었다고 김훈의 아버지를 김훈의 시점에서 바라본 에세이다. 문학에서 흔히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이 한없이 낯설면서도 또한 친숙하게 다가오는 공감대가 쉽게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누군가의 아버지면서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작가의 아버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재미있던 일화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부분이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이미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 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 푼씩 주고 돌아갔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28~29쪽


  지금 우리 시대의 ‘김승옥’ 같은 인물은 누가 있을까. 내가 알고 작품도 읽은 인물이 당시에 이렇게 회자되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고, 지금 우리 시대의 ‘김승옥이라는 녀석’은 누가 될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또한 이 뒤에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일화라든지 책에 실린 과거 수상 소감 모음에서 2005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 소감인 황순원 선생님과 일화를 적은 ‘지표가 된 약봉투’같은 소감문 역시 인상적이고 재미있다. 내가 아는 문인들의 대한 쉽게 접할 수 없는 일화들이기 때문이다. 김훈이 당시 황순원 선생님의 약봉투가 지표가 되었듯이, 이런 글들은 나에게는 또다른 지표로 남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생명의 개별성’ 같은 수필은 김훈이 ‘화장’이라는 단편을 쓰게 된 계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작품에서는 읽을 수 없는 배경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에세이를 읽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도 인상적인 글이었다.


  “저 여인네가 혹시 박경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짬뽕 그릇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자의 무리를 떠나서 그 여인네 쪽으로 접근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음으로 멀리서는 인상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네는 과연 박경리 선생님이었으며, 그 아이는 그 아버지가 수배망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1974년 4월 19일 날 태어난 강(岡)*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김지하는 1973년 4월 7일 김영주와 혼인하였고 강은 그로부터 일 년 후인 1974년 4월 19일에 태어났음으로, 강은 그 부모의 신혼 초에 점지된 것이 확실하고 강이 태어난 지 일주일 후에 인혁당사건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바로 그 날 흑산도에 피신해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하는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박경리 선생님의 등에 업힌 저 아이는 생후 10개월 미만일 터였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86~87쪽


  김훈이 기자 시절을 하던 중 박경리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관찰한 글인데 그 광경이 선연히 떠오르면서 마치 나도 그 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박경리 선생님이 또한 허리춤에 들어 올린 아이는 훗날 이름은 원보로 바꾸었다고 주석에 나와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나우누리 환타지 동호회에 연재한 글을 읽었으므로 새삼 이 글이 더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박경리라는 작가를 또한 알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서 기록한 이 에세이가 재미있게 느껴질 듯하다.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라는 에세이도 참 좋았다. 소방관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을 김훈이 기자 시절 곁에서 지켜본 이야기가 적혀 있다. 김훈의 차분한 문장으로 그려진 그들의 삶은 담대하면서도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문장의 행간마다 설움과 정열이 깃들어 있다. 고단한 삶을 그리고 고립과 삶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매일 불 속에 뛰어드는 소방수들, 산화하는 대원들, 울부짖는 가족들.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고 눈가가 아려지는 글이다.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글이다. 아름답다.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은 이 책에 실린 그림을 그린 오치균에 대한 글이다. 처음에 마지막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서 참 독특한 그림이라고 느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오치균의 그림들이 여러장 실려 있다. 독특한 색표현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처음 보는 화풍이었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예술이었다. 이 에세이에는 오치균의 인터뷰가 중간중간 들어가면서 김훈의 묘사가 뒷따른다. 화가의 목소리와 작가의 목소리, 그림과 글이 결합된 독특한 에세이라고 느꼈다. 그림도 글도 하나같이 만족감을 준다. 그림과 글이 만날 때 새로운 예술이 나온다. 독자는 그 접촉점에서 만족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부분 중 하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쓰다듬어 보고 글을 읽고 그때마다 새로운 걸 느끼게 될 듯싶다.

  ‘회상’과 ‘말과 사물’은 김훈이 행한 강연을 기초로 스스로 재구성한 원고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이기 때문에 읽기 편하고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강연’ 때 한 말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쓴 작품들에 대한 내용도 많이 있어서 김훈의 책을 읽은 독자라면 재미있을만한 구석이 많다.

  또한, 김훈이 가진 언어에 대한 자세와 생각들은 깊은 인상을 준다. 동어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김훈의 노력은 그의 글쓰기에서 나타난다.


  수박은 본래 그렇다는 얘기. 그렇다면 그걸 그렇게 설명을 하고 나서, 그런 언어에 의해서 우리가 인간의 의식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확장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동어반복일 뿐입니다. 수박은 본래 그렇다. ‘A는 A다’라는 말을 한 것이죠. 이것이 언어의 함정입니다. ‘A는 A다’라고 말하면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사람이 입을 벌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갖고 있는 사전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의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이 동어반복의 지옥을 벗어나서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습을 직접 포착하고 그것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학과 자연과학의 목적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156쪽


  작가는 이 동어반복의 지옥을 소설 『개』를 통해서 벗어날까 생각했다고 한다. 어림도 없는 짓을 시작한 것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세상을 동어반복에서 벗어나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김훈이 쓴 김훈의 말과 사물이 적혀 있는 책이다. 이 책이 김훈은 김훈이라는 동어반복을 벗어나 김훈이라는 실체를 드러낼 수 있을까. 아마 역시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 에세이만으로 김훈을 접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차례로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 실체에 조금씩 접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언젠가 김훈이라는 실체가 우리 앞에 드러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시작을 밝히고 있다.

  김훈의 글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도 역시 에세이였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실기시험을 보기 전에 김훈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 당시 집에 있던 책은 그의 소설책이 아니라 에세이인 『자전거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단순하고도 힘 있는 문체와 문장 사이마다 서려 있는 슬픔과 애환의 정서, 강직함, 가열 찬 에너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낯선 단어들을 공책에 옮겨 적고 몇 개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새로운 문장과 세계를 접했다. 그리고 수필로 그의 문장을 처음 만나고 5년이 지나 또 다른 에세이 『바다의 기별』을 이제 읽게 되었다. 그 사이 그의 소설도 읽었지만, 소설과는 다른 에세이가 갖고 있는 감성과 진정성은 남다르다. 여기에는 기자 시절의 김훈이 있고, 언어에 대해, 그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하는 작가 김훈이 있다. 김훈은 김훈이지만, 동어반복의 한계를 누구도 벗어나기 힘들지만, 우리는 이 글로 김훈이 김훈이라는 그 사실을 더욱 깊게 접할 수 있다. 그의 목적성과 그의 단순함과 그의 치열함을 읽을 수 있고, 행간 너머에 그의 사유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아마도 몇 년 뒤에도 나는 이 사람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김훈은 김훈이라고 말할 테지만, 그 때의 나와 김훈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을 기대하며 감상을 마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저의 소설은 대부분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 소설에는 종교나 내세나 구원이나 피안이나 이런 것들이 나오지 않고, 오직 이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만 나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생각의 나무, 167~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