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책읽기

상속 /은희경 소설

헤븐드림 2009. 12. 3. 01:35

 

 

책소개

'오디션을 통과했다'고 자평할 만큼 작가 특유의 '삐딱한 시선'이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으로 확장되어 더욱 빛을 발하는 세 번째 소설집. 이상문학상 수상작 「아내의 상자」를 제외하고는 2000년대에 들어와 쓴 중 · 단편을 묶었다. 

작가가 실제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표제작 「상속」은 평론가 김동식의 말처럼 작가에게는 중요한 작품이 될 듯하다. 죽음을 앞둔 한 가장을 둘러싼 건조한 풍경들, 가족 관계에 냉소적인 태도를 지녔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이 도달한 지점이 예사롭지 않다. 

삶과 죽음, 일상을 이해하는 작가만의 코드를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이 작품집에 실린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 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로 2002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작가파일보기 작가의 추천저 : 은희경

 Eun Hui Gyeong,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했고 전주여고를 거쳐 숙명여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과 내면적 상처에 관심을 쏟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여 젊은 작가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등단 3년만인 1998년에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하면서 소설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이렇게 살다 내 인생 끝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노트북 컴퓨터 하나 달랑 챙겨 들고 지방에 내려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은희경의 인생을 바꿨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자, 산사에 틀어박혀 두 달 만에 을 썼다. 이 작품이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필명을 날리게 되었다. 한 해에 신춘문예 당선과 문학상 수상을 동시에 한 작가는 1979년 이문열, 1987년 장정일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1997년에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을, 1998년에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제2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 2000년에 단편소설 『내가 살았던 집』으로 제26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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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반복되나 봐. 한 번 치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목차

1.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2.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3. 상속
4. 딸기 도둑
5. 내가 살았던 집
6. 태양의 서커스
7. 아내의 상자

해설 - 연기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김동식
작가의 말

책속으로

J는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부터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아침이슬이 깔린 호수공원을 걸었다.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뿐한 것이 아마 신발이 편해서일 것이다. 그 신발에 알 수 없는 탄력과 온기가 있다고 생각하며 J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들이 더 자라면 아들과 함께 걷게 되겠지만 지금은 혼자라는 게 나쁘지 않았다.--- p.153


삶을 지속하기 위해 육체는 늘 보살핌을 받는다. 인간의 삶이 육체가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는 데에 육체의 권능이 있었다. 아무리 멋진 정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육체가 죽어버리면 하는 수 없이 멋 부리기를 끝내야 한다. 고통의 수식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 속한 세계의 규칙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위안 없는 생으로부터 잠깐씩 벗어나게 해주었던 꿈의 행방을 잃은 것에 새삼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딸은 오해했다.--- p.233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아 있는 부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닿을수록 더욱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봤지만 살이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본문 중에서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은혜가 간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딸기를 사가지고 그 애의 아파트에 찾아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주 많은 딸기를 갖고 갔었어요. 딸기 따위는 너무 흔하고 하찮아서 훔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만나지는 못했죠. 그 집은 불이 다 꺼져 있었고 사람의 기척이 없이 조용했거든요. 마음이 답답해져서 그곳 옥상에 올라가 잠시 바람을 쐰 다음 집에 돌아와 김치를 마저 담갔고, 그러고 나서 아래층 화단에 김칫독을 묻었을 뿐이에요. 그런 다음에요? 오래오래 손을 씻고 저녁밥을 먹고 나서 베란다에 널었던 빨래를 걷었지요. 국을 끓이려고 남겨두었던 마지막 배추 한 통을 칼로 가르다가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신문지 위로 쓰러졌던 겁니다. 왜 믿지 못하죠?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비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채로 기억을 놓쳐버리는 일이 전에도 종종 있었다고 말했잖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지요. 그들이 대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아세요? 제가 은혜의 목구멍을 딸기로 막아버린 뒤 온몸을 딸기로 짓이겨 아파트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렸고, 그런 다음 집에 돌아와서 잠들어 있는 그의 배를 마치 배...

펼처보기 --- pp.189~190

추천평

어릴 때 읽었던 한 전래 동화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등장했었다. 작가와 독자의 직접 소통인 셈이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까. 무서운 얘기를 할까 아니면 우스운 얘기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슬픈 이야기로 할까.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대답한다. 무섭고도 우습고도 슬픈 이야기! 그래서 할아버지는 무서운 도깨비가 우습게도 똥간에 빠지는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던가 하는 줄거리이다. 소설을 쓰는 중에 가끔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떄 나는 실컷 웃으면서 읽고, 다 읽은 뒤에는 어쩐지 슬퍼지며, 그 웃음과 슬픔이 만든 좁은 틈 속에 내던져진 채로 불현듯 무서움을 느끼는 그런 소설을 쓰려고 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