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46년 4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만 2살 때 건축가셨던 아버지는 저를 등에 업고,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피난하셨습니다.
서울서 남쪽으로 피난할 때에는 광나루를 건너야 했습니다.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짐들을 수레에 싣고 광나루를 건넌 후, 모래사장에 잠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미국 공군 전투기인 B29가 도강하던 피난민들과 우리를 북괴군으로 오인하여 포격을 가해 왔습니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식구들에게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흘러내리는 넓은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65년도에 용산고교를 졸업하고, 74년도 고대 의대를 졸업하기까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의대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군의관으로 12사단의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위험한 곳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근무한지 3개월만에 육영수 여사의 죽음과 동시에 군부대는 비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떨렸고 전쟁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난 것은 막연히 믿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죽을 때까지 열심히 믿어야겠다는 생각과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매일 위생병들과 같이 예배드리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러던 어느 날, 두 주일이 넘도록 계속 비가 내렸는데, 부대에서 작업을 하기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습니다, 저녁 참모회의 때 대대장이 각 중대장들과 참모들에게 작업 지시를 하던 중 갑자기 “군위관 비오지 않게 기도좀 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랐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작은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저는 곧 의무대로 돌아와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대대장님이 알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커튼을 제쳐보니 놀랍게도 비는 멎었고 회색구름이 검은 구름 사이사이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 주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후 입대 1년이 되었을 때에, 횡성의 공병 부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기쁜 일은 민간교회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영적으로 깊이 체험한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6년 9월 1일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때에는 하나님께 또 제가 잘못한 것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작한지 만 50일째인 1976년 10월 20일에 새벽기도중 마음에 감동이 오면서 몸이 뜨거워지며 입에서 방언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 후부터 기도의 갈증이 나기 시작했고 성경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야전 잠바에 늘 성경을 넣고 틈틈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후에는 새벽 기도시간 2시간 으로는 부족해 잠자기전 교회에 가서 2시간 정도 더 기도해야 마음이 풀렸습니다.
또 한번은 독신장교 숙소에서 밤잠을 일찍 청하려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눈감은 시야가 전부 구름으로 보이면서, 그 구름이 파장을 이루며 멀리 멀리 밖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와 동시에 큰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기쁨에 취한 저는 약 2시간을 기도하게 되었는데 11시반 사이렌 소리가 울려 그만 아쉬움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저는 대위로 제대하게 되면서 횡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0년 레지던트 3년차 때에 결혼했고, 1982년에 비뇨기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 영등포 시립병원 (현 보라매병원)에서 비뇨기과 과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83년부터 서안복음병원에서 피부 비뇨기과 과장으로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며 늘 복음을 전했습니다. 외래 환자들에게 진료를 마친 후에 복음을 항상 전했고, 예수님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집의 약도를 그리게 하여, 주일에 그 집을 찾아가 교회로 모셔 오곤 했습니다. 이렇게 매일 전도하여 6년 동안 7, 8교회에 298명을 등록시켰습니다. 저는 일단 교회에 등록시킨 후에는 주일 아침과 저녁, 그리고 수요일에 3개월을 제 차로 모시고 다녔습니다. 처음에 저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던 분들이 후에 믿음이 자라, 직분들을 맡게 되고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전도할 때가 제일 기뻤고 선교사로 가고자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병원에 근무하면서 공부도 계속하여 1984년 9월에는 고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총신대 신대원을 마쳤습니다.
이후 1989년 12월 한국대학생 선교회 파송, 충현교회 후원으로 저희는 파키스탄으로 떠났습니다. 저희는 우선 그 나라 공영어인 ‘우르두’어를 공부했고, 현지 교회를 다니며 모슬렘 문화를 익혔습니다. 일년 반 후인 1991년 여름에 우리는 병원이 있는 ‘카라치’로 내려갔고, 병원의 이름은 ‘선한 사마리아병원’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는 선교팀의 팀장으로 있으면서 팀원들을 격려하며 환자를 돌볼 뿐 아니라, 아직 다 완성되지 못한 병원의 건물을 현지 일군들을 고용하여 수리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우르두’어를 계속 공부하면서 현지어로 환자와 대화했고, 전도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파키스탄에서는 현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예수님 믿기를 권하거나, 교회에 나가라고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환자에게 보다 적극적인 전도를 하고 싶어 한 가지 전도할 꾀를 내었습니다. 그것은 진료한 후에 ‘우르두’어 성경을 펴놓고서 좀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습니다. 혹시 환자가 그 내용을 읽다가 성령님이 역사 하실 때 그것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한 모슬렘 고등학교의 재정 담당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술레만’인데, 이는 솔로몬의 ‘우르두’어 이름입니다. 우리는 자주 만났는데, 제가 그의 학교에 가기도 하고,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1년 반을 교제하는 동안에, 저는 그에게 조금씩 예수님을 소개했고, 성경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그 형이 주님을 믿기로 결심한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난 후 두 청년들을 격려하며 축하해 주었고, 신앙을 잘 유지하도록 당부했습니다. 그 후에 두 청년들은 고향인 ‘싸카’로 돌아갔는데, 저희가 파키스탄을 떠난 1994년 까지도 교회에 잘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93년에는 잠시 한국에 들어와서 10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94년 3월에는 한국에서 안식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고대 병원에 나가 새로운 비뇨기과 수술법을 익히며, 잊었던 비뇨기과 공부를 복습했습니다.
1995년 8월부터는 총회에서 하는 MTI 27기 훈련을 받았고, 그 해 8월 27일에 람원교회에서 총회 파송식이 있었습니다. 그 후 1996년 3월에 저희 부부는 총회 파송과, 람원교회 주 후원으로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먼저 힌디 공부를 위해 ‘머수리’에 있는 ‘랜도르’언어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제 사역지인 데라둔 지역의 ‘허버트뿌르’ 기독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환자들을 진료하며 전도했는데, 어느 날 소변을 잘 못 보는 할아버지에게 전립선 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수술 전에 수술 방에서 기도 드렸고, 수술 후 몸이 회복된 후에는 병실에서 힌디 쪽복음으로 매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침 그의 아들이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는 귀가 잘 안 들려서 침대에 누운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경청했습니다. 환자는 수술 경과가 좋아 곧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원 전날인 주일 아침, 병원 채플에 나오도록 아들에게 권유했습니다. 주일 아침, 채플에 가기 전에 병실에 가보니 아들은 아버지의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예배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는 나오면서 다른 환자의 보호자인 한 청년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따라 나왔고, 우리 세 사람은 채플의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예배 후에 저는 환자 아들에게 예배드린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뒤따라 나왔던 청년이 자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기뻤습니다. 그들은 병원에서 북쪽으로 차로 한 나절 더 가는 ‘히마철 쁘라데쉬’ 주에서 왔는데, 그 곳에는 교회가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힌디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집에서 매일 읽으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간 후에, 환자의 아들에게서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저는 답장해 주면서 계속 성경 말씀을 읽을 것을 또 다시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씀을 읽을 때에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드릴 뿐이었습니다.
인도에서 1996년 12월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도 정부가 외국 의사들에게 선교비자를 주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의료 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저희는 한국에 돌아와 다른 선교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지에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97년 4월에 아내와 함께 답사를 갔습니다. 피지에는 인구의 절반이 인도 사람들이었고, 저는 그들과 ‘힌디’어로 의사 소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피지에 보낸 후에, 그 해 7월에 피지로 떠났습니다.
처음에 일한 병원은 ‘바’ 기독병원이었습니다. ‘바’ 지역은 주민의 80%가 인도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67세 된 노인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요로 기관의 암으로, 소변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수술 전에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힌두교인이었으나 예수님을 설명할 때 잘 이해했습니다. 그가 퇴원한 후에도 저는 매주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세 아들을 포함, 25명이 되는 대가족이었습니다. 저는 방문할 때마다 찬양을 인도했고,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는 노인의 건강이 암으로 많이 나빠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갑자기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가족이 보는 앞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온 식구에게 확인시켜준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하늘나라로 가고, 할머니를 비롯하여 10여명의 가족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피지는 기독교인들이 4%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려는 인도 청년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씽가토카’ 신학교에서 1년 공부한 두 청년들이 저희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은 다니엘(20)이라는 인도인이며, 다른 청년은 존(18)이라는 ‘로뚜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두 청년들로 하여금 우선 바울 전도를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마을에서 복음에 관심있는 힌두교인들을 발견하게 되면, 저는 병원에서 일이 끝난 후에 함께 가서 말씀을 나누고, 교회로 모시고 오곤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꾸마리’라는 한 인도인 과부가 첫 번째로 교회에 나왔으며, 성경공부에도 참석했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다리의 상처로 걷기 힘들어하는 노인이 있었는데 치료해 드리면서 이웃 교회의 목사님께 인도해 드렸습니다. 또한 ‘라우토카’병원에도 두 청년들을 오게 하여 간호사의 양해를 얻어 전도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신장에 질병이 있는 17세 된 모슬렘 소년 ‘자이나 칸‘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외에도 두 청년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실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청년을 뉴질랜드에 있는 웩 성경대학에 보냈습니다. 지금 그들은 디플로마 과정을 마치고 오는 1월 말 다시 피지로 돌아옵니다,
저는 지금까지 11년을 해외에서 선교사로 일하며, 많은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 기쁨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해외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선우 형식 약력
1946. 4 평양 출생
1977∼1982 고대병원 비뇨기과 수련의 과정,
비뇨기과 전문의 취득
1982∼1983 보라매병원 비뇨기과 과장
1985∼1988 총신대 신학대학원
1989∼1994 파키스탄 CCC 의료선교사(팀장),
충현교회 주파송
1993 목사 안수
1995 총회 파송예배, 람원교회
*심사평/‘참 자아 찾아 가기’ 담담하게 표현
박종구 목사<월간목회 발행인>
한명수 목사<창훈대교회>
이번에 입선된 수기들은 읽는 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신앙수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비체험의 황당한 전개나, 신유체험의 극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있다. 의도적 구성이나 기교도 없다. 그래서 진솔한 감동을 준다.
일상의 작은 사물인식으로부터 내면의 깨달음으로 심화시켜 나가는 무리 없는 스토리들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만나게 한다.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이야기에 포커스가 있는게 아니고 오늘의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 생명력 있는 메시지가 생동감을 더한다.
우수작으로 뽑힌 선우 형식의 글은 타 문화권에서 11년간 의료선교사의 전도수기로 그의 삶 전체가 전도생활로 채색되어 있다. 영혼 사랑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신앙의 갈등을 넘어 참 자아의 모습을 찾아가는 내면 추구가 담담하게 전개되고 있는 송광택의 수기는 오늘의 삶 속에 승화된 신앙이 표출되어 있다.
해외 선교사역 2년의 문화충격을 피부에 와 닿게 묘사하고 있는 승명자의 글은 자녀교육의 어려운 상황을 넘어 현지인 사랑으로 주님의 섭리를 담았다.
이 두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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