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youtube.com/watch?v=4-5yWDliZZw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미국계 피아니스트. 1903년생으로 1920년대에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유대계인 사무일 호로비츠와 소피아 보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6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첫 스승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소피아였고, 세르게이 타르놉스키 아래에서 제일 오래 공부하였다. 그 결과, 키예프 음악원에 겨우 9세에 입학. 삼촌과의 연을 통해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앞에서 연주하고 재능있다는 평가를 들은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기교나 스타일은 완성기에 접어들어, 블루멘펠트는 "피아노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서유럽으로 떠날 때 블루멘펠트는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어떤 스승도 모시지 말라"고 했다(!). 다만 굳이 찾아야겠다면 베를린에 있는 페루초 부소니를 찾아가라고 했다.
본래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다지만 이후 러시아 혁명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로서, 소년가장으로 데뷔하게 된다. 소년 가장이라고 하지만, 이 때 양친은 멀쩡히 생존. 호로비츠는 훗날 이 시절에 무슨 정신으로 콘서트 준비를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회고했다. 당시 준비한 프로그램은 총 열 개. 두 시간 길이 기준이다. 2년간 수십번의 공연을 했는데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3회), 당시 러시아 내전 직후의 국내 사정 때문에 공연비를 자주 빵, 초콜릿, 버터 등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중 1925년에 베를린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대단히 호평받았다.
그렇게 미국 데뷔도 하게 되고 우상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음악적 능력이 있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 토스카니니 호로비츠와 결혼하고 딸 소냐를 얻기도 했다.
계속 연주를 이어가던 그는 과도한 스케줄과 평생 가는 우울증 때문에 콘서트를 중간중간 쉬곤 했었다. 여기서 특히 1953년부터 1965년까지 12년간 한 번도 콘서트를 열지 않은 최장 기간의 은퇴가 있기도 했다. 첫 2년간은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피아노 연주 자체를 포기하려고도 했었다고. 그래도 RCA에서 음반 제작은 비교적 꾸준히 했고, 이는 아내 완다의 도움과 함께 그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카네기 홀에서의 복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5월에 카네기 홀에서 열린 복귀 리사이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역사에 길이 남는 이벤트였다. 이틀 전부터 카네기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음 블록까지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완다의 회고에 따르면 아예 매트리스를 들고 와 잠을 지새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표를 사려는 이들을 위해 도넛과 커피를 보내줬다고 한다. 표는 인터넷 예매 등이 없던 당시로써는 매우 빠른 시간인 2시간만에 매진돼버렸다.
이후 연주 경력에 별다른 차질 없이 콘서트를 많든 적든 꾸준히 열었었다. 1983년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로 인해 심각한 연주상의 문제를 겪어 잠깐 쉬긴 했지만, 2년만에 화려하게 복귀해 최고로 무르익은 노장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기도 했다. 쉬면서 제자들을 받을 나이인 80세 이후에도 음반사와 전속계약까지 맺어가며 녹음활동 또한 계속 이루어졌다. 마지막 연주 여행은 1986년~1987년에 있었으며 마지막 리사이틀은 1987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다. 그 이후로도 녹음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9년에 페라이어 부부의 저녁약속을 앞두고 아내 완다와 이야기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음반은 RCA, 소니와 도이치 그라모폰 등에서 나와 있다. RCA의 녹음들은 주로 20~50년대, 그리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소니(원래 CBS)는 60년대 초반~70년대 초반, DG(도이치 그라모폰)에서는 1985년부터의 극후기 레코딩이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소니에서 나왔다. DG에서는 이 거장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사람을 고용해서 녹음을 했는데, 호로비츠 사후에 이 사람이 소니로 회사를 옮길때 이 녹음까지 같이 가져갔기 때문.
https://www.youtube.com/watch?v=fRJ_etlzUBE
RCA는 초기여서 음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호로비츠가 RCA의 음질과 악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기록도 꽤 있다. 소니는 스테레오 시절 이후라 꽤 괜찮은 편이다. DG 판은 정말정말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 실황연주와 그 이후의 음반들로서 전성기의 기교보단 노장으로서의 훌륭한 통찰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모스크바 연주에 모스크바 대학의 한 교수는 '그의 연주는 단단하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같았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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