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앞 언덕에 초가 한 채가 있었다. 이 땅에서 일본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진 다음 해 봄이었다. 그 지붕에 난데없이 대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가끔, 그 집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새어나오는 찬송가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교인이라야 부인네 예닐곱, 초등학생 대여섯이었다. 대처에서 집사 노릇을 하던 분이 귀향하여 있다가 자기 집 대청에 차린 예배당이었다.
그 해 여름, 친구 따라 강남에 가듯이 나도 예수꾼이 되었다. 난생 처음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도 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옛 일, 이제는 그 예배당의 뜰에 감나무가 있었는지 대추나무가 서 있었는지 아슬하고, 집사님이 흰 두루마기를 입었는지 검정 목도리를 둘렀는지 감감하나, 오직 한 토막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가 교회에 나간 지 이틀 만에 친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초상집에 교인들이 모두 모였다. 마당에 쳐놓은 차일 밑에 멍석이 여러 장 깔려 있고 몇 개의 밥상이 놓여 있었다. 모두들 거기에 맞대 앉았다. 임종 예배를 마치자 이내 국수 사발이 나왔다. 그때 국수 한 그릇은 대단한 식사였다. 어른들 틈에 앉아 꼬마 교인들도 국수를 행복하게 먹고 있는데, 미처 교회에 안 다닌 친구들은 우리 주위에 서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하늘의 은혜는 끝이 없다. 이틀 전에 교인이 된 나는 은혜가 충만한 문상객의 자격이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침을 흘리고 있던 옛 친구들을 생각하면, 시방도 나는 밥을 먹다가도 웃음이 복받쳐오른다. 하나님도 한참 웃으셨을 것이다.
두메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시골뜨기는 청운의 뜻을 품고 독수리같이 서울에 올라왔다. 예배당에 이틀 다니고도 큰 은총을 입었으니,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재중학교에 거뜬히 입학하였다. 2학년이 되자, 엄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부반장이 되었다. 성경을 배우는 시간이 따로 있고 시험도 치르고, 매주 한 차례는 전교생이 강당에서 예배를 보았다. 시골 집사님은 김구 선생처럼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서울 학교 목사님은 링컨 대통령처럼 나비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다. 목사 선생님이 가장 거룩한 스승으로 보였다.
학교 담 너머에는 유서 깊은 정동교회가 있었다. 배재학당 당장이던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교회였다. 나라 운명이 기울 무렵, 민족의 선각자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배재 학도였던 청년 이승만도 이 예배당에서 믿음을 품게 된다. 나는 그 고색창연한 벽돌집 예배당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검붉은 건물이 고아하고 우거진 숲이 좋기도 했지만, 그 교회에 이승만 대통령이 주일마다 왕림한다는 풍문을 들어서였다.
번번이 허탕을 쳤다. 6·25가 닥쳐서 내가 한강을 건널 때까지 대통령은 한 번도 거동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을 만나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바 아니었고, 지금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메시아를 학수고대하지 않고 오로지 경무대 할아버지를 알현하려 했으니, 철없고 당돌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하나님도 내 소행을 내려다보시고 미소지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자는 게 아니라 국무총리도 아니고 대통령을 보겠다고 예배당에 다닌 죄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나는 동족 상잔의 전화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여, 대한민국에서 들어가기 가장 어려운 대학에서 들어가기 가장 쉬운 학과를 졸업하고, 바야흐로 배재학교의 선생이 되었다.
내 어렸을 적에 예배를 보던 강당은 체육관이 되었다. 나는 어설픈 목자가 되어, 예배 시간이면 학생들을 양 떼처럼 정동교회에 몰고 가서 예배를 보았다. 마르고 닳도록 권좌에 있은 대통령은 그때까지도 예배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어른이 된 나는 대통령을 뵐려는 갈망을 거의 잊어버리고, 군사부일체의 선생으로서 소년 시절에 드나들던 예배당에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이 한 백성을 굽어보고 매우 기뻐하셨을 것이다.
6·25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언제 주저앉을지 모를 시민 아파트에서 조마거리면서 살았다. 한 스무 평쯤 되는 집에 살게 해주시라고 기도를 드렸다. 땅에 떨어진 돈이라도 줍게 해주시라고 간절히 빌었다. 아마,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듣고 크게 웃으셨을 것이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빈 손으로 광야를 헤매고 다닌 분의 재산을 따져본다면, 나는 작은 재벌이던 것이다. 내가 늘 병약하여, 어린 딸들이 시집갈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시라고 빈 적도 있었다. 서른셋 나이에 십자가를 진 분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했으니 될 말이 아니다.
이제금 나는 예수님보다 갑절이나 살고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 내 속된 소망을 헤아리고 하나님은 가여워서 웃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웃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성경 어디에도 웃음이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옛 전설을 다 뒤져보아도 예수님의 미소는 나타나 있지 않고, 그 많은 성화에도 웃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근엄하고 침통한 얼굴뿐이다. 바티칸 성당의 하고 많은 조각이나 벽화에도 웃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뚱딴지 같은 환쟁이가 파안대소하는 예수상을 그렸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어쩌면 웃음을 진지함의 상실이나 엄숙함의 결여와 연결시켜 그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어리석은 백성은 하는 일마다 어리석다. 몽매한 백성들은 눈을 감고 예수님의 자애로운 미소를 보고, 귀를 막고 예수님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분이 만든 사랑의 정원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다. 예수님은 나 하나의 못난 짓을 보고 골백 번도 더 웃으시고, 만백성의 웃음거리는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하겠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서 목수 노릇을 한 분이고, 더러 포도주를 들기도 한 분이다.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면서 이웃과 농담을 나누기도 하였을 것이다. 술판이 벌어졌는데 비통한 자세로 술잔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잔치에 술이 동이 나자, 그분은 많은 물 항아리를 포도주 도가로 만들었다. 하객과 예수님은 박장대소하며 주연을 즐겼을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두 개의 떡이 수천 개로 불어났을 때만 웃음판이 벌어지지 아니 하였다.
성경에는 불쌍한 사람을 어루만져주는 해학, 권세를 부리는 자를 꾸짖는 풍자,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지가 넘치는 익살이 가득하다.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 가로막고 있는 자가 우리를 웃긴다. 저도 안 들면서, 남들도 못 들어가게 하는 심술이 더 우습다. 우매한 벽창호를 나무라는 풍자다. 풍자는 웃음을 깃들인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눈이 먼 자가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할 리 없다.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맹인 잔치를 찾아나선 심 봉사는 애교나 있다. 앞선 맹인을 따라가는 뭇 맹인의 행렬은 우습다 못해 서글프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위선자를 꾸짖는 말씀이다. 흐린 눈으로 밝은 진리를 볼 수 없다.
‘어찌하여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기지가 번득인다.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위선자의 가면을 벗기는 호통이다. 그 비유와 상징이 모두 높은 차원의 골계이다.
저 깊고 넓은 성경의 웃음 속에는 늘 사랑이 깃들어 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 예수님은 수학자이시다. 벌을 내려야 할 사람을 490번이나 용서한다면, 죄인은 벌을 받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이 끝이 없어서, 기가 막혀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러나 너나없이 잘잘못을 가려본다면, 누구나 490번의 잘못을 저지르고 490번도 더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는 용서할 자격이 없고 용서를 받을 처지에 있을 뿐이다. 사백하고 아흔 번이 오히려 적은 숫자다. 참회의 눈물이 있고, 참회의 웃음도 있다.
예수님은 터무니없는 과장적 수사를 써서 만백성을 웃기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이 땅에 사랑이 넘치는 웃음을 베푸셨다. 웃음은 커다란 은총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지난 봄, 타향살이 50년 만에야 고향을 찾았다. 산천이 의구하지 않고 많은 인걸은 간 데 없었다. 더듬거려 찾아낸 초가교회 터에는 농업협동조합 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감나무도 대추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 중에 누가 초상마당에서 국수를 먹고, 누가 손가락을 빨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물어보기 전에, 눈빛이 예수님을 닮았던 집사님이 궁금하였다. 남북의 싸움이 이 산골에서 벌어졌을 때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마을 앞 느티나무에 묶어 놓고 총을 쏘았다고 하였다. 작은 초가에 여남은 교인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친 죄가 그렇게 컸나 보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보아도 당신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진악
배재대 박물관장 역임.
수필집 『익살』, 『아름다운 틀』, 『유머 에세이 34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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