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피조물은 모두 시간에 붙잡혀 있거나 혹은 거기에 갇혀 꼼작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 안에서 계속 그 시간을 따라 어느 피조물이든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흐름이란 생명의 흐름일 수도 있고, 시간을 따라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삶이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시간이 물의 흐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의 흐름은 갇히면 물이 썩어 죽게 되는데, 누가 감히 시간의 흐름을 막고 붙잡아 어디에 묶어둘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약속 시각을 기다리면서 오래 기다릴 때 ‘시간만 죽이고 있다.’라는 말도 하지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은 어디 한 곳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약속 시각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누구도 시간을 붙잡아 둘 수는 없다. 누구도 시간을 어디에 붙잡아 매두지 못할 만큼 시간은 계속 흐르는 원천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누구는 택시를 붙잡아 두고 사람을 기다리며 시간을 붙잡아 두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택시가 붙잡혀 있다고 해서 시간이 붙잡힌 것은 아니다. 시간은 계속해서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진실이다.
시간이 모든 피조물을 자기 안에 모두 가둬 둘 수는 있지만, 모든 피조물이 보이지도 않는 시간을 어떻게 가두어 묶어둘 수 있겠는가? 이처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시간 속에서 반드시 얼마만큼의 시간의 제한을 받게 돼 있다. 정해진 시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는 있어도 시간은 창조주를 제외한 그 무엇에도 제한받는 예는 없다.
모든 피조물의 제왕처럼 군림하는 시간이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케 되었을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는 걸 보아서 그의 힘의 정체와 크기를 짐작할 수가 없다. 모든 피조물은 시간의 제한 앞에서 속수무책이지만, 피조물이 시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시간은 저절로 존재케 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피조물이다. 시간을 만든 원자재는 창조주께서 첫날에 만드신 빛이었다. 그렇다고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신 데만 사용치 않으셨다. 빛으로 기존의 어둠을 나누어 밤과 낮을 조성하셔서 하루라는 날을 만드셨다. 하루라는 시간은 밤과 낮을 하나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창조하셨다. 그래서 시간은 어둠과 밝음, 이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 시간 가운데서 사람들은 기쁨도 만나고, 슬픔도 만나며 삶을 산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 식물이든 동물이든,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밝음과 어둠의 양면에서처럼 서로의 다름 가운데서 삶이 있고, 그 안에 쉼도 있다. 모든 생명체는 행불행을 언제든 경험하며 살아간다. 빛과 어둠, 어느 하나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피조물은 그 어느 것도 존재치 않는다.
모든 생명체에게 어둠과 빛이 필수적이란 사실을 안다면, 창조주께서 왜 시간을 밤과 낮을 합하여 하나로 만드셨는지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시간은 어둠과 빛의 동시적 존재요, 시간 속의 어느 하나가 빠지면, 생명체의 삶은 그것으로 끝난다.
모든 피조물의 늙음은 시간 속, 곧 밤과 낮의 조화 속에서 얻는 삶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늙음은 젊음의 연장 선상에 있고, 젊음은 늙음의 뿌리이기도 하다. 젊음은 늙음을 경험치 못해 모르는 면이 있을 수 있지만, 대신 늙음은 젊음의 의미를 알고 추억으로 지니고 산다. 젊음은 늙음을 알지 못하면서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깨닫는 젊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젊음이 있는 것도 가시적 현실이다. 시간 속에서 어둠과 밝음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인지 모른다.
늙음은 여린 싹의 어린 시절을 지나왔고, 꽃도 피워보았고, 씨앗을 맺어 풍성함도 누려보았지만, 젊음의 지금은 잎의 시기이거나 꽃을 피우려고 기다리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잎이든 꽃이든 그 결과가 열매이고, 하지만, 늙음은 다양한 열매를 맺어 또 땅의 이곳저곳에 뿌려준 풍성함을 경험한 세대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류 역사 가운데서 창세기 5장에 등장한 장수한 사람들의 족보는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자세히 밝혀진 바 없지만, 그들의 마지막이 늙음이요, 마지막이었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가 바로 오늘의 인류를 지구상에서 존재케 한 위대한 힘으로 흘러넘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어야 한다. 무엇이든 생명체는 시간 속에서 자람이 있고, 꽃을 피우고, 이어서 열매가 맺힐 때가 있고, 거기서 또한 쇠함이 있고, 늙음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씨앗이나 열매 가운데 자신과 같은 종류의 생명을 남겨 두기도 하고, 뿌리 식물들은 뿌리에 생명을 묻어두었다가 여건이 맞는 곳에서 때를 만나면, 거기서 자신의 생명살이를 시작하기 마련이다. 생명을 지닌 피조물들은 무엇이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지만, 동시에 시간 속에서 쇠하여 늙고 죽음을 맞아 피조물의 원래의 형태를 잃게 되기도 하지만,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모습을 지니는 생물들에서 늙음이 또 다른 변화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늙음을 일컬어 내 나름대로 시간의 선물이라 말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살아가는 과정이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생명살이의 성숙도 있지만, 한 편으론 죽음에 가까워지는 늙음도 있게 마련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인류 조상들의 늙음이 1000년에 가까웠던 사실을 보면서 늙음이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과정임을 알도록 장수케 하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창5).
하나님의 첫 피조물이 빛이지만, 빛으로 어둠을 나눠 조성된 것이 밤과 낮이고, 그것이 첫 피조물인 시간의 하루이다. 하루가 또 다른 하루로 흘러간다. 지나가는 시간이 계속되고, 다가오는 시간과 만나지만, 그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특히 인간을 말하는 경우 그들이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음을 미리 말씀하셨을 적에 그것은 영적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Spirit)은 원래 영원한 것이기에 죽음과는 관계가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영적 죽음을 맞게 되면, 인간의 육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에 이어 늙음과 맞닿는다. 쇠퇴와 늙음이 생명 기관의 여러 기능을 퇴화시키면서 육체가 죽음을 맞는다. 이것이 곧 수명의 한계점이요, 자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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