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아이 / 심명옥
생각만 해도 벌써 땀이 난다. ‘여름’이라는 글자 어느 획엔가 땀구멍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글자에 따라오는 장면들까지 하나같이 끈적끈적하다. 후텁지근한 공기, 퀴퀴한 냄새, 쉬 상하는 음식, 덜 마른 빨래 등등 보송한 수건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다.
설렘으로 무장한 봄과 황홀함을 차려입은 가을 사이에 자리한 여름은 단벌신사다. 봄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처럼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주문한다. 연초록 새싹을 선두로 하여 팡팡 터트리는 꽃들에 이르기까지 봄의 몸짓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작은 웃음소리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가을은 또 어떤가. 다채로운 붓질로 물든 가을은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든다. 노랗고 붉은 융탄 폭격에 기꺼이 항복해도 괜찮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짧고 풍만한 보상에 취하는 순간이다. 봄과 가을은 그 자체로 그냥 계절의 주인공이다. 도드라진 두 계절에 비하면 여름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나에게 있어 여름은 헐벗은 겨울과 겨뤄도 진다. “여름과 겨울 중 어느 계절이 좋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민 없이 겨울을 고른다. 추위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더위는 어떻게 막을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꼬박꼬박 저장한 살을 들키기 쉬운 계절도 여름이다. 평생 여름에 인색했다. 심지어 여름이 생일인 것도 싫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노래에 나오는 겨울 아이를 부러워했다. 겨울엔 눈싸움이라도 하지, 난 물놀이는 싫다. 여름을 밀어낼 구실은 어디든 있었다.
여름은 참 볼품이 없다. 식물들은 더위에 지쳐 힘이 없거나 장맛비에 고꾸라져 맵시가 안 난다. 초록이 덮어버린 숲은 숨이 막히기도 한다던가. 봄 내내 터지던 감탄을 집어넣고 여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앙증맞은 봄이 건네준 기억을 서둘러 가을에 이어 붙이려고만 했다. 마치 가운데아이처럼 여름은 두 계절 사이에 끼어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가운데로 태어난 난, 자랄 때 자주 혼란에 빠졌다. 요즘처럼 자녀 한둘을 낳는 세대가 아니라서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치였다. 오빠는 아들이라고, 언니는 첫딸이라고, 동생은 막내라고 부모님에게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새 옷은 언니와 동생에게 돌아갔고, 내겐 꾸지람이 왔다. 아끼는 내 신발에 동생이 흙을 묻혀 놓아 혼냈다가 도리어 내가 혼났던 적도 있다. 분명히 잘못은 동생이 했는데, 형제자매간의 다툼에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예쁨 받고 싶었다.
결핍은 간절함을 부른다. 애정에 대한 갈증으로 공부를 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스스로 자라는 법을 알았고, 세심한 성격을 갖게 됐다. 독립심도 덤으로 얻었다. 낀 아이들이 갖는 공통적인 설움인 걸 알고는 상처를 털어낸 지금은 오히려 웃지만, 자랄 땐 나름 심각했다.
어쩌면 여름도 눈치 백단인 거 아닐까. 좋은 계절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여름은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장맛비와 무더위와 싸워가며 말없이 생명을 키워낸다. 아픈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초록에 깊이를 더하며 가지를 뻗어 끝내 그늘까지 내어준다. 가을을 위해 열매에 색 입히기 밑 작업도 소홀히하지 않는다. 그 어떤 계절보다 성장의 속도가 빠르다. 뒤늦게 여름을 고쳐 읽는다. 여름은 가운데 아이를 닮아 내숭 없고 생명력이 강하다. 어떤 조건에서도 버티고 살아남는 매력적인 계절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운명적으로 여름 아이다. 신기하게도 인생에 있어 좋은 일은 모두 여름에 왔다. 세상에 온 날뿐만 아니라 남편을 처음 만난 날도, 결혼한 날도, 수필가로 인정받은 날도 모두 여름에 있다. 그 날들은 내게 찬란한 햇살의 인상으로 새겨졌다.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도 여름에 닿아 있는 게 많다. 평상에 앉아 쏟아지는 별을 올려다보며 옥수수를 먹던 밤을 기억한다. 모깃불 때문에 눈물 흘린 일조차 아름답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코로는 흙이 토해내는 짙은 내음을 맡던 한가로운 시간도 스쳐 지나간다. 평생 딱 한 번 아버지 등에 업혀 맡은 땀내가 그립다. 무더위에 짓눌려, 소중한 여름날들을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나 보다.
인생에 있어서도 난 지금 여름 안에 있다. 인생을 사계절로 구분해 어울리는 계절을 잇댄다면 쉰을 훌쩍 넘긴 나는 어느 계절 속에 서 있다고 해야 할까. 혼돈의 청춘을 지났으니, 봄이 아닌 건 확실히 안다. 아이들을 한창 피어나는 봄에 세웠으니, 두 계절 앞선 정도에 서 있어야 템포가 맞을까. 아니다. 그러기엔 아직 이르다. 미완의 나는 감히 성숙의 계절인 가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사소한 일에 휘둘려 감정을 소모하기도 하고, 남몰래 속앓이할 때도 많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배우고 성장하며 여름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돌고 돌아 여름에 안주한다. 여름을 떼어놓고 나를 설명할 수 없는데, 그동안 대접을 소홀히 했다. 뒤늦게 여름의 진가를 발견한 만큼 더 힘껏 끌어안으리라.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꿉꿉한 공기를 부채질하며 제빛으로 아름다운 가을로 가기 위해 묵묵히 걷기로 한다.
여름이 웃는다. 여름 아이가 주름을 편다. 다음 계절로 난 길을 쳐다보는 아이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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