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큐티

아가서 5장

헤븐드림 2024. 7. 16. 03:54

제 5 장

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5장 강해: 신랑의 아름다움

1-5절, 신랑의 방문

[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우유]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본절은 신랑의 말로서 신부의 말(4:16)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그의 동산에 들어왔고 그의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었고 그의 꿀송이와 꿀을 먹었고 그의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고 말한다. 그의 동산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랑되신 주께서는 성령으로 교회 속에 즉 성도들 가운데 오셨고 지금 그들 안에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했다(고후 13:5).

‘몰약과 향 재료’는 성도들의 선하고 덕스러운 행실을 상징하고 ‘꿀송이와 꿀’은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있는 음식이다(시 19:10; 119:103). ‘포도주와 우유’도 생명과 영양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사 55:1-3; 계 22:17). 주께서는 속죄의 은혜를 먹는 음식과 마시는 음료수에 비유하셨고(요 6:53-56)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유에 비유했다(벧전 2:1).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나의’ 것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다 주님의 구원의 결과이며 주의 영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신랑은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 사랑하는 자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와 고백이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천사들과 모든 신자들이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을 나타낸다.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본절 이하의 여러 절들은 신부의 말이다. 신부는 육신적으로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고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신랑을 얼마나 사모하였던지 잠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었고 그의 문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섭리로 깨우치시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른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은 친근한 사랑의 대상임을 말하고, ‘나의 비둘기’는 이상적 교회의 온유함과 순결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마 10:16). ‘나의 완전한 자’라는 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비록 부족투성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로 여기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문을 열어 달라’는 신랑의 말은 요한계시록 3:20에 있는 주의 말씀과 비슷하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사람의 마음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신다. 문을 여는 것은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상징할 것이다.

또 신랑은 자기의 머리에 이슬이, 그의 머리털에 밤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께서 범죄하고 연약해진 성도의 마음 밖에서 그가 회개하기를 오래 기다리심을 상징할 것이다.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사람이 낮에 일할 때는 옷을 입고 주로 발로 뛰지만, 밤에 쉴 때는 옷을 벗고 발을 씻는다. 지금 신부는 밤이 되어 쉬기 위해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다. 비록 사모하는 신랑이 찾아왔으나 일어나 옷을 입고 맞기에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 신랑을 맞을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를 주저한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적 평안이나 안일에 빠져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연약하고 무능하여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초청에 즉시 응답지 않고 때때로 응답을 지연하거나 주저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나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신다. 그것은 주께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찌르듯이, 손을 들이밀듯이, 감동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손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되신다. 마태복음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혹은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의 심령을 찌르시는 것이 성령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행 16:14). 주께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주셔야 우리가 주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를 수 있다.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떨어지는구나].

신부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저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회개와 순종의 결단을 상징할 것이다. 주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심히 빈곤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으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며 마침내 굳게 결심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눅 15:20). 사도 바울도 처음 믿을 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행 22:16).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3:19).

신부가 문을 열 때 몰약이 그의 손에서, 몰약의 즙이 그의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졌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향기가 좋은 식물이며 성경에서 관유의 재료로 쓰였고 그 외에도 진통제와 방부제로 쓰였다. 신부는 몰약 향유를 손에 풍성히 바르고 신랑을 맞이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손에서, 손가락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일 것이다.

신부의 손과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몰약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회개와 순종의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회개와 순종은 자기 부정의 고통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행위이다. 죄와 불순종은 추한 모습이며, 회개와 순종은 향기로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합당한 마음과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성령의 감동으로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행 11: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기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그의 의(義)를 감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육신적 만족과 안일에 빠져 있지 말고 때때로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의 음성에 응답하고 그를 영접하며 그를 따라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꿀송이와 꿀로, 포도주와 우유로, 몰약과 향 재료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성경말씀에 합한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 그 말씀에 근거한 선한 인격과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6-9절, 신랑을 만나지 못함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신부가 뒤늦게 깨달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물러갔고 떠난 후이었다. 때가 늦었다. 신부는 문 앞에서 신랑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신부의 더디 응답함과 주저함, 즉 그의 안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같았다. 사람이 그의 초청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외면하시는 경우도 있다. 잠언 1:24-26,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찾아야 한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는 말은 2절에서 신랑이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할 때 그가 정신이 나가서, 바른 정신이 없어서 즉시 응답하여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다는 신부의 자책의 말이라고 본다. 신부는 정신이 없어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 바른 정신이 있었다면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하였을 것이나, 기회를 잃었다.

신랑이 이미 떠난 후이었기 때문에 신부는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그를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 마지막 날에 천국문이 닫힌 후에도 늦게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눅 13:24-25).

 

[7절] 성중에서 행순(行巡)[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신부는 신랑을 찾으러 문밖에 나갔고 성중에서 성을 돌며 지키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를 상하게 하였다. 성벽을 지키는 자들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의 웃옷을 벗겨 취하기까지 하였다. ‘순찰하는 자들’이나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를 사모하는 진지한 신자를 돕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고 핍박한 것이다.

이런 일은 교회역사상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많이 있었다. 땅 위에 이상적 교회가 없었다. 지상 교회들은 항상 많은 연약을 보였고 때때로 심히 부패했다. 선한 직분자들은 경건하여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돌아보지만, 악한 직분자들은 경건하고 진지하기보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경건한 교인들을 멸시하고 비방하고 중상모략하였으며 그들을 낙심시키고 핍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을 자기만 먹이고 약한 자들을 강포로 다스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겔 34:2, 4).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왕이나 제사장들은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다. 예수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다. 사도 바울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교회의 부패는 그 지도자들, 그 직분자들의 부패에서 잘 드러났다.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아가 2:5에서도 그는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고 말했다. 그는 신랑을 너무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병이 났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하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나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보지 못하여 병이 날 때도 있다. 시편 41편 저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주위의 조롱 때문에 주야로 눈물까지 흘렸고 그의 영혼은 낙망하고 불안해 하였다(시 41:1-3, 5).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함으로 그의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0).

그러나 이런 때에도 성도는 낙심치 말고 주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갑자기 멸망당한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덫과 같이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눅 17:27-28; 21:34). 그러나 참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눅 18:1; 마 24:42-43).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하야파)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신부는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불리운다. 이 표현은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은 극히 아름답다. 그것은 영적, 도덕적, 인격적인 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적 신자들은 경건하고 성결하며 선하고 진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형제들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반 교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의 뛰어나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을 홀로 창조하셨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대속제물이 되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는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계 5:12).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금은보화도 주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불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따르려는 성도가 때때로 교회 안에서 비방과 핍박을 당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금방 얻지 못하지만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교회의 불완전함을 보거나 비방과 핍박을 당할 때 낙심치 말고 주님을 찾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를 찾고 찾으면 그를 만나고 응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 더 사랑할 만한 것, 더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10-16절, 신랑의 아름다움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신랑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이 가장 사랑해야 할 분이시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으므로(엡 5:2), 우리도 그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희다’는 원어(차크)는 ‘눈부시다, 맑다’는 뜻이다(BDB, KB). 그것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붉다’는 말은 그의 건강하심 즉 그가 쇠하지 않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다. 그는 아무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두 번이나 그의 무죄하심을 증거한다(히 4:15; 요일 3:5).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하였고(고후 5:21), 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고 증거하였다(벧전 2:22).

또 예수께서는 항상 건강하시고 약하지 않으신다. 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25). 그는 약함이 없는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사도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다(계 1:17-18). 히브리서 13:8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했다.

그는 만 사람에 뛰어나신다.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시며(빌 2:6-11) 만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16) 그 분과 비교할 자는 아무도 없다.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11절부터 16절까지에서, 신부는 신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고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신부는 신랑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한다. 정금은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낸다. 만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는 가장 귀하며 금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시다(계 14:14).

또 신부는 신랑의 머리털이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다고 말한다. ‘고불고불하다’는 원어(탈탈림)는 ‘흔들리는 야자나무 가지들’을 뜻한다(BDB).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원기왕성함을 뜻한다. 사람이 젊고 건강하면 머리털이 많고 새까맣지만, 노약해지면 머리털이 적고 희어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월이 흐른다고 쇠약해지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신 생명의 주님이시다.

[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신부는 신랑의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으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순결함의 상징이다(마 3:16; 10:16). 그것은 짐승의 사체(死體)를 먹는 까마귀가 불결함을 상징하는 것과 대조된다. 더욱이 시냇가의 비둘기는 시냇물에 씻은 것처럼 깨끗함을 나타낸다. 신부는 그것이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거룩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13절]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돋운 화단]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향기로운 풀들과 나무들이 있는 꽃밭과 화단은 아름다운 풀과 꽃 때문에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향기롭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다운 주님이시며 그의 인격은 참으로 향기롭다. 주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히브리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증거하였다(히 7:26). 또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벧전 1:18-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으시다.

또 신랑의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듯이 은혜로운 말씀이 가득하시다. 누가는,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증거했다(눅 4:22). 또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증거하였고(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다(요 1:16-17).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신부는 신랑의 손이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말한다. ‘황금 노리개’라는 원어(갈릴)는 ‘원통 막대, 혹은 막대기’라는 뜻이다(BDB). 옛날 영어성경은 ‘반지(ring)’라고 번역했고(KJV)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막대기(rod)’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손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지체이며, 특히 무엇을 나누어줄 때 꼭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은혜와 능력의 손이다. 그는 그 손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손이 황옥에 물린 황금 원통 막대와 같다는 것은 그의 행하시는 일들과 은혜를 나누어주심이 부요하고 순수하고 존귀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에베소서 4:7, 11,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몸이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다고 말한다. ‘몸’이라는 원어(메에)는 ‘창자, 배, 몸’ 등의 뜻을 가진다. 특히 ‘창자’라는 뜻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상징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아름답고 지극히 존귀한 몸이며 특히 그의 마음에 가득한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15-16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대리석] 기둥 같고 형상[모습]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신부는 신랑의 다리가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다리는 몸을 이동하고 지탱하는 지체이다.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어디든지 잘 다닐 수 있고 높은 계단도 잘 올라가며 또 오랫동안 서 있어도 피곤치 않는다. 그러나 다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어디 다니기도 힘들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처럼 아름답고 튼튼하시다. 그는 많은 죄인의 죄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요 1:29). 그는 솔로몬 성전 앞 낭실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왕상 7:21-22) 그의 나라와 교회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악한 세력의 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견고히 서 있다.

또 신부는 신랑의 모습이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아름답고 크고 위엄 있음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주 예수님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시고 그의 모습을 본 사도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졌었다(계 1:17).

또 신부는 신랑의 입이 심히 달다고 말한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그의 입이 심히 달다는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심히 은혜스럽다는 뜻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성도들에게 심히 은혜가 된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부는 신랑의 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신랑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러하시다. 그는 조금도 흠과 점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지극히 사랑하며 기뻐해야 한다(벧전 1:8).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희고 머리는 정금 같으시며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우유로 씻은 듯이 아름답고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으시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영광스러우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를 따라 항상 거룩하고 선하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하고 또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해야 하고 결코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굴과 피부가 붉고 머리털이 검으시며 그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대리석 기둥 같으시다.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시고 쇠하지 않으시고 튼튼하게 행하신다. 우리는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받아 늘 힘있게 그를 믿고 따라가야 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입술이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며 그의 입의 말씀은 심히 달다. 그는 오늘날도 성경말씀 안에서 성령의 감동 속에 풍성한 은혜의 말씀, 꿀같이 단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그 말씀을 늘 사모하며 받아 누리고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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