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책읽기

삶을 바꾼 만남/정민

헤븐드림 2024. 1. 30. 11:28

아! 과골삼천 
동문 밖 주막집 
60년간 새긴 말씀 
사의재와 읍중 제자 
문심혜두를 어찌 열까? 
이 시는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학질 끊는 노래 
새벽의 생각 
동기부여 학습과 칭찬 교육 
20년 공부가 물거품입니다 
채마밭을 일구고픈 욕망 
내외가 따로 자라 
이제부터 시사가 원만하겠다 
우물우물 시간을 끌었다 
한겨울의 ...

 

 

책 속으로..

-정약용과 강진 시절 제자 황상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만남 앞에서도 길 가던 사람과 소매를 스치듯 그냥 지나쳐 버리고는 자꾸 딴 데만 기웃거린다. 물론 모든 만남이 맛난 것은 아니다. 만남이 맛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외손바닥으로는 소리를 짝짝 낼 수가 없다.
한번의 만남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 되는 맛난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인 황상(黄裳, 1788~1863?)이다. 시골의 학구(学究)에 불과했던 그의 문집 《치원유고(梔園遺稿)》를 뒤적일 때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정약용과 황상과의 만남에 얽힌 글 몇 편을 소개한다.
황상은 63세 때인 1851년 3월 30일 밤, 이미 15년 전에 돌아가신 스승 다산을 꿈에서 만난다. 잠에서 깬 뒤 그는 그 일을 시로 적었다. 제목은 <몽곡(夢哭)>이다.

간밤에 선생님 꿈꾸었는데
나비 되어 예전 모습 모시었다네.
마음이 기쁜 줄은 알지 못했고
보통 때 모시던 것 다름없었지.
수염 터럭 어느새 하얗게 쇠고
얼굴도 꽃다운 모습 시들어.
아미산 눈덮힌 산 마루 아래
천 길 높은 소나무가 기울어진 듯.
천행으로 이런 날 은혜롭구나
백 년에 다시 만날 기약 어렵다.
예전에도 꿈에서 뵌 적 있지만
이처럼 모시긴 처음이었네.
술과 국 차가운 제사상에는
제사 음식 이리저리 놓여 있었네.
나는 실로 찬찬히 보지도 않고
두 기둥 사이에서 절을 올렸지.
무릎 꿇고 조아려 애도하는데
곡성이 먹은 귀를 놀라게 하네.
마음에 품고만 있던 생각이
그제야 겉으로 드러났어라.
때 마침 옆 사람 흔들어 깨워
품은 정 다하지 못하였어라.
애도함 이보다 더는 못하리
아마도 세상이 끝난 듯했지.
목이 메어 말조차 떼지 못하고
헛된 눈물 주룩주룩 흘러내렸네.
꿈에 곡함 아침에 누가 알리오
모습은 내 눈에 여태 선한데.
시 지어도 누구에게 평을 청하며
의심나도 여쭙던 일 생각만 나리.
추모함에 한가한 날 적기만 하니
영령께선 내 충성됨 환히 아시리.
지난날 향 사르던 자리에서는
백 척의 오동처럼 우러렀다네.
못나고 둔한지라 얻은 게 없어
못 이룸이 삼대밭의 쑥대 같았네.
선생의 문도라기 이름 부끄러
소와 양에 뿔조차 없는 격일세.
한 마음 순수하긴 처음과 같아
잠자리서 전날 공부 펼쳐본 것을.
昔夜夢夫子 蝴蝶侍旧容
不知心怡悦 惟如平日従
鬚髪暮已衰 容顔度芙蓉
峨眉雪嶺上 偃蹇千尺松
天幸恵此日 百年難再逢
曾匪夢不拝 未有如此供
酒醤寒羞奠 俎豆横復縦
我実不視具 兩楹致其恭
稽顙方挙哀 哭声可驚聾
念念存在懐 到此已露胸
際被傍人撹 未能尽其衷
問哀無過此 無乃天地終
歔欷不成道 虚涙猶涳濛
夢哭朝誰猟 儀形方眼中
得詩従何評 当疑憶撞鍾
追慕少暇日 尊霊明予忠
昔於焼香席 望如百尺桐
暗鈍無所得 未成麻中蓬
名惜丁門徒 牛羊乃犝동(羊+童)
一心純如初 枕上発前功

스승은 늙고 쇠하신 모습으로 쓰러질 듯 앉아 계신데, 이상스레 그 앞에는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선생님을 다시 뵌 것만 무한히 기뻐 무릎 꿇고 절을 올리는데 갑자기 곡성이 진동하였다. 그제서야 스승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발을 구르며 애도하는데, 옆 사람이 흔들어 깨우는 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물이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붉은 마음이 생생히 느껴지는 글이다. 황상은 열다섯 살 나던 1802년 10월 정약용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으로 귀양 와 있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겁이 나 문을 꽁꽁 닫아걸고 받아주려 하지 않아, 그는 하는 수 없이 동네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기식하고 있었다.
황상은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집을 찾았다. 그렇게 며칠을 내쳐 찾아가 쭈빗쭈빗 엉거주춤 글을 배웠다. 7일째 되던 날 다산은 황상에게 글 한 편을 써주었다. 이 글은 다산의 문집에는 없고, 황상의 문집에만 실려 있다.

내가 황상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빗쭈빗 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 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당시 나는 동천여사(東泉旅舎)에 머물고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잔뜩 주눅 든 소년에게 선생은 기를 북돋워준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단다. 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말지.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지.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거칠 것이 없겠지.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마침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 것이야.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말도록 해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할 수 있을까? 네 마음을 다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니?”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스승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리고 스승을 처음 만난 지 61년이 지난 임술년에 그 떨리던 첫 만남을 기억하며 <임술기(壬戌記)>란 글을 한 편 지었다. 정약용의 윗 글도 이 글 속에 들어 있다. 윗 글에 이어지는 황상의 술회를 보자.

내가 이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당시는 어려서 관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스승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폐하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비록 이룩한 것은 없다 하나, 구멍을 뚫고 막힌 것을 툭 터지게 함을 삼가 지켰다고 말할 만하니 또한 능히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라는 세 글자를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일흔다섯이 넘었으니 주어진 날이 많지 않다. 어찌 제멋대로 내달려 도를 어지럽힐 수 있으랴. 지금 이후로도 스승께서 주신 가르침을 잃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자식들에게도 져버림이 없이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임술기를 적는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소년은 그로부터 61년의 세월이 지나 일흔여섯이 되도록 스승이 남겨주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자나깨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눈물겹게 고백하고 있다. 따뜻한 가르침은 이렇듯 깊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번은 황상이 스승에게 숨어 사는 이의 거처는 어떠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때도 다산은 제자를 위해 긴 글을 써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은자(隠者)의 공간을 그려 보여주었다. <제황상유인첩(題黄裳幽人帖)>이 그 글이다. 워낙 길어 부분만 옮긴다.

땅을 고를 때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강과 산이 어우러진 곳은 시내와 산이 어우러진 곳만은 못하다. 골짜기 입구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어야겠지. 조금 들어가면 시계가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런 곳이라야 복지(福地)다. 중앙에 지세가 맺힌 곳에 띠집 서너 칸을 나침반이 정남향을 가리키도록 해서 짓는다.
치장은 지극히 정교하게 해야 한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로 벽을 바르고, 문설주 위에는 엷은 먹으로 옆으로 길게 뻗은 산수화를 붙이도록 해라. 문설주에는 고목이나 대나무 또는 바위를 그리고, 중간에 짧은 시를 써넣기도 해야지. 방안에는 서가 두 개를 설치하고, 서가에는 천 삼사백 권의 책을 꽂도록 한다. (중략)
책상 아래에는 오동(烏銅) 향로를 하나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옥유향(玉㽔香)을 하나씩 피운다. 뜰 앞엔 울림벽을 한 줄 두르는데, 높이는 몇 자 남짓이면 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가장 많이 갖추어서 48종 정도는 되어야 잘 갖추었다 할 만하다. 마당 오른편엔 작은 연못을 파야겠지. 사방 수십 걸음 정도면 된다. 연못 속에는 연꽃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길러야지. 대나무를 따로 쪼개 물받이 홈통을 만들어 산의 샘물을 끌어다가 못에다 댄다. 물이 넘치면 담장 틈새를 따라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중략)
소나무 북쪽으로 작은 사립문이 나 있는데, 이리로 들어가면 누에 치는 잠실 세 칸이 나온다. 잠박(누에를 치는 데 쓰는, 싸리나 대오리 등으로 결은 채반)을 7층으로 앉혀놓고 매일 낮 차를 마시고 난 뒤 잠실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에게 송엽주 몇 잔을 내오게 해서 마신 뒤, 양잠에 관한 책을 가지고 가서 누에를 목욕시키고 실 잣는 법을 아내에게 가르쳐주며 상긋이 마주 보며 웃는다. 문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글이 이르더라도 씩 웃으며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귀양지에서 다산이 매일 밤 꿈꾸었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황상은 스승이 내려주신 이 말씀을 역시 잊지 않고 간직하다가 강진 대구면의 천개산(天蓋山) 아래 백적동(白磧洞)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한다. 만년에 스승의 말씀을 따라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지은 뒤에 또 스승 생각이 나서 시를 지었다.

몇 해 전 두릉(斗陵)에서 밤비 오던 때
집 짓겠단 내 생각 알고 놀라셨었지.
구름 노을 가려도 즐거움 그지 없고
여린 대와 짙은 꽃들 기이함을 잊게 하네.
그 옛날 <장취원기(将就園記)> 받자옵고는
일속산방 제목으로 시 지었었네.
아아! 도의 싹이 난만하게 터나왔건만
거두어서 전해 드릴 길이 없구나.
曾歳斗陵夜雨時 先生驚我已心期
霞封雲開能云樂 竹細花濃転忘奇
昔奉田園将就記 便題粟屋已成詩
所嗟爛熳道芽発 未得収持伝送為....

 

<장취원기>는 명말의 황주성(黄周星)이란 이가 지은 글로 자신이 꿈꾸던 상상 속의 정원을 그려 보인 유명한 문장이다. 옛날 다산이 황주성의 <장취원기>를 읽어주자, 황상은 자신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스승께 아뢰었고, 그 꿈을 시로 지어 올리자 다산은 앞서 본 <제황상유인첩>을 지어주며 숨어 사는 선비의 바른 마음가짐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일속산방(一粟山房)이란 말 그대로 좁쌀 한 톨만한 작은 집이란 뜻이다. 시에서는 두릉, 즉 양수리 초천으로 스승을 찾아뵙던 일을 먼저 말했다. 시의 둘째 구절 아래 황상은 “내가 일속산방을 짓겠다는 뜻을 아뢰자, 선생은 놀라시며 ‘자네가 어찌 내 마음을 말하는가?’라고 하셨다”고 작은 글씨로 주를 달아놓았다. 구름과 안개 노을이 포근히 덮어 가려주고, 가는 대나무 숲과 향기 짙은 꽃들이 푸르름과 향기를 실어주는 곳. 그 옛날 스승께서 일깨워주신 그 가르침에 따라 이곳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속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얻은 깨달음을 여쭙고 싶지만 들어주실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니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19년에 걸친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은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했다. 그후로도 제자들은 해마다 힘을 합쳐 차를 따서 서울에 계신 스승에게 부쳐드리곤 했다. 하지만 스승을 잃은 다산초당은 점차 황폐해져갔던 듯하다. 황상은 스승의 체취가 못 견디게 그리우면 문득 다산초당을 찾아 한참을 머물다 가곤했다.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초당의 옛터를 서성이며 쓴 시를 보면 스승이 손수 파서 새긴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를 어루만지다가, 스승이 일군 대숲과 연못을 보며 지난 날의 맑은 풍정을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스승이 계시던 옛터를 백 년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서글퍼했다.
그러던 그가 다산이 강진을 떠난 18년 후 1836년 2월 무슨 느낌이 있었던지 스승이 계시던 두릉 땅으로 다산을 찾아뵈었다. 스승 내외의 회혼례(回婚礼)를 축하드리고, 살아 계실 때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뵙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다산은 병세가 위중해 잔치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다섯 소년이었던 제자는 쉰을 눈앞에 둔 중늙은이가 되어 죽음을 앞에 둔 스승께 절을 올렸다. 곁에서 며칠 머물며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었을 때, 다산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그의 마디 굵은 손을 붙들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그냥 보내기 안타깝다며 접부채와 운서(韻書), 피리와 먹을 선물로 주었다. 스승과 제자가 헤어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그저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이 안 되어 다산은 세상을 떴다. 황상은 도중에 스승의 부고를 듣고, 그 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 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 황상은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学淵)은 10년 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내려왔다. 황상은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 와 스승의 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로부터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정황계안(丁黄契案)>은 황상의 문집에 실려 있다. 황상과 정학연, 정학유 형제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과 자, 생년월일을 차례로 적은 뒤 끝에다 이렇게 썼다.

이것은 우리 두 집안 노인의 성명과 자손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정학연은 침침한 눈으로 천리 먼 길에 써서 보낸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갈진저. 계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삼가 잃어버리지 말라.

이 해가 1848년이니 이때 정학연은 예순 여섯, 황상은 예순 하나였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았다.

 

정민 교수

 

정민/저자 소개

충북 영동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다.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다산 정약용이 창출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과 그 삶에 천착하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을 펴냈다. 더불어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