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목련/김경주

헤븐드림 2023. 3. 14. 06:21

 

 

(20)김경주-비정형의 사유를 연주하다

2007.06.01 15:58

시인 김경주는 전천후다. 목련의 처연한 죽음(‘목련’)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정신현상학에 부쳐’)을 똑같은 톤으로 노래하고, 시나리오와 희곡과 장시(長詩)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다. 서정에 능한 가객인가 싶다가도 다시 보면 이렇게 치열한 사색가가 또 없다. 이 무모하리 만큼 완강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외로운 날에는 살을 만진다”(‘내 워크맨 속의 갠지스’)라고 적었다. 이 시인은 저 자신의 살에서 우주의 기미(幾微)를 엿보고 영혼의 음악을 듣는다. 이 ‘살’(감각)의 직접성과 확실성이 그의 위력이다. 그는 시를 쓰지 않는다. 감각으로 시를 밀어붙인다. ‘나쁜 피’와 ‘취한 배’의 시인 랭보의 혈족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1976년에 태어나 2003년에 시인이 되었고 2006년에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펴냈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대산창작기금 심사평), “무시무시한 신인”(권혁웅)과 같은 평가가 과장이 아니냐고 힐난할 일이 아니다. 과장하게 만드는 것도 재능이다. 그의 시에는 읽는 이를 몰아붙여 감탄과 탄식의 언사를 기어이 발설케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비정성시) ‘절박’과 ‘부패’와 ‘오류’로 밀어붙이는 시라니, 이렇게 대책 없이 젊은 시라니, 도대체 얼마만인가.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선언이 그래서 얄팍해 보이지 않는다. 책상머리에 앉아 제작한 시가 아니다. 생을 절박하게 탕진해 본 자의 오만한 고독이 그의 시를 만든다. 그 진정성이 어색한 비문(非文)과 현학적인 각주까지도 다 삼켜버린다. 이런 잠언 투의 문장은 또 어떤가.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악을 듣는 일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 1’),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 5’) 금방 소비되고 마는 잠언들과 다르다. 지혜를 설파하는 잠언이 아니라 싸움을 선포하는 잠언이기 때문이다.

“황혼에 대한 안목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 죽은 나무속에 사는 방(房)과 죽은 새 속에 사는 골목 사이에 바람의 인연이 있다 내가 당신을 만나 놓친 고요라고 하겠다”(‘기미(幾微)’에서)

“불가피하게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 눈이 너로 인해 번식하고 있으니 오늘은 너를 사랑한다 오늘은 불가피하게 너를 사랑해서 내 뒤편엔 무시무시한 침묵이 놓일 테지만 너를 사랑해서 오늘은 불가피하다.”(‘몽상가’에서)

그의 첫 시집에서 이보다 더 잘 만들어진 시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런 문장들 앞에서 유독 서성거리게 된다. 잘 훈련된 시인의 시는 정련된 언어와 정확한 이미지로 명쾌한 전언을 실어 나른다. 그러나 시인으로 타고난 자들은 때로 의미를 제로로 만들고도 포에지를 100으로 끌어올리는 이상한 재능을 휘두른다. 우리를 사로잡아 사유를 강제하는 것은 절차탁마된 노회한 시들이 아니라 온 몸이 악기인 자가 연주하는 이와 같은 혼신의 노래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때로 난해하지만 그 난해함은 읽는 이를 소외시키지 않고 외려 빨아들이는 이상한 난해함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사유하는 감각’의 권능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늘 유배였고 그들의 교양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상식은 죽어가는 가축의 쓸쓸한 눈빛을 기억할 줄 아는 것이었다.”(‘비정성시’) 이것은 김경주가 포착해 낸 유목민의 본질이지만 우리가 읽어낸 김경주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는 시인과 나이가 같다. 책상에 앉아 세상을 저울질 하는 이 백면서생은 거칠고 아름다운 유목민의 노래를 밤마다 경외와 질투가 범벅된 눈으로 야금야금 읽는다.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고 말하는 벗이여, 너의 현생까지도 음악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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