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역사 간증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헤븐드림 2022. 4. 8. 07:09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의 문학은 단명했다.

언제든지 작품을 쓰면 그만이지, 문학적 단명이 웬말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김승옥을 현역 작가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80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먼지의 방’ 일부가 신군부의 검열로 삭제되자 그는 펜을 던졌다.

이후 사반세기동안 그는 무진의 안개속에 잠긴 듯 여전히 말이 없다.

기나긴 절필의 세월과 작가의 온전한 침묵에도 불구, 후배 소설가들과 문학 청년들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단편소설로 갈증을 달랬다.

소설가 신경숙이 작가 수업을 할 때,‘무진기행’을 노트에 한자 한자 옮겼을만큼 그의 단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편의 시였다.

김승옥이 20대에 글에서 멀어져 빈둥거리고 있을 때,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이어령이 그를 호텔에 감금하고 거의 반강제로 글을 쓰게 하여 단편을 하나 썼는데 그게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서울의 달빛 0장’이다.

그런 김승옥이 어느날,비몽사몽간에 하나님과 조우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졌을 때 저으기 당황한 것은 문단 내부였다.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 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문학사적 평가를 받은 김승옥이 더 이상 문학 텍스트를 생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1981년 4월27일 새벽,그는 잠자리에서 하나님의 손을 느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서울 강남구청 옆 해청 아파트 4층 자택이었다. “내 왼쪽 허리 위 공간에 하얀 손이 팔목까지만 나를 향하여 보라는 듯 떠 있는 것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빛깔로 약간 크고 손가락이 쭈욱 쭉 뻗은 남자 손이었다.…어리둥절해 앉아 있는데 내 오른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방안 허공에서 약간 울림이 있는 아주 굵은 음성으로,뚜렷한 한국어로 ‘하나님이다’는 말씀이 들려왔다.”(산문집 ‘내가 만난 하느님’에서)

해소수를 보낸 어느날, 영화각본을 쓴다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는 어떤 기운에 온 몸이 휩싸인 채 입에서 방언(方言)을 터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 김승옥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어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40일 금식기도,인도 선교사로의 소명….

하지만 시련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선 지 3년만인 2003년 2월,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주위 사람들은 더욱 속을 쓸어내렸다.

치료 끝에 퇴원은 했지만 더듬거리는 언어 장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월 100만원이 넘는 통원 치료비를 대느라 살림이 쪼들리는 바람에 에니메이션을 전공하러 유학을 떠났던 아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의 말년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혼자 거동할 만한 깜냥은 되어 그는 요즘 외출이 잦다.

외출은 늘 아슬아슬하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휴대폰은 아예 갖고 다니지 않지만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들고 메모지를 보여주거나 손짓을 해가며 행선지의 위치를 묻는 일이 허다하다.

주로 가는 곳은 출판사나 동창회 모임,그리고 옛 지인들과의 모임이다.

한 출판사의 S씨는 “어떤 학생으로부터 ‘김승옥’이라는 분이 메모를 보여주며 길을 묻는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면서 “생활이 어려운 듯 선뜻 택시도 타지 못하고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오다 길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어떤 지원책이 없을까요”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S씨의 음성에서 김승옥이 헤갈을 하던 낯선 길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슴거린다.

무신론 시절에 쓴 그의 빛나는 소설은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을 직접 들은 그가 더 쓸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왜 그에게서 말까지 빼앗아갔는지,

하늘의 뜻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승옥은 앞으로 남은 삶에서 무엇을 더 증거하게 될 것인가. 하늘은 언어를 드러낼 때 무엇이라도 떨어뜨리는 것인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천재의 언어가 유난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