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상황
1938.8.23. 독일-소비에트 조약체결
1939.9.10. 독일의 첫 폴란드 침공(본회퍼 귀국 후 두 달 후)
9.12. 영국·불란서의 대 독일 선전포고가 있고 다시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미 그의 핑켄발트 학생들은 전선으로 끌려 나가 전사했다.
본회퍼 역시 1939.9. 강제징집에 대해 군목을 지원했으나
1940.2. 거부를 당했다.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후 본회퍼는 ‘집단목회훈련’의 책임을 받아왔으나 1940.3 결국 강제 해산을 당하고, 고백교회의 순회목사로서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했다.
❚ 본회퍼에 대한 나치스의 법적 제한
① 1936.8. 교수의 권리 박탈(문화성)
② 1940.9.4. 설교금지(경찰)
③ 1940.9.9 저서 출판 및 설교/강연 금지 및 경찰에 생활 보고 의무.
다섯 번 째 광야 여행 -정치적 저항 그룹에 가담 .
매형 도나니(Haus Von Dohnanyi)와 카나리스(Canasis) 장군(제독)이 이끄는 군정 본부에 근무, 오스터(Oster) 장군과 함께 본회퍼를 독일 군 정보부 민간 정보원으로 추천하였는데, 이는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군 징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다른 하나는 본회퍼의 해외 에큐메니칼 인사들과의 지연을 이용하여 저항세력의 대 연합국가와의 연락 창구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신학자였던 그는 이제 나치에 저항하는 일원으로서 1941.1 모든 수속을 마쳤다.
▷정치적 상황 / 1940.5.10 베네룩스 나라와 프랑스 침공.
6.17 프랑스 항복.
9. 영국 대공습.
10.28 이태리의 그리스 침공.
1941.6.22 소련 침공.
9. 1. 유대인 격리·수용.
10.16. 베를린 역에서 첫 호송열차 출발
12.7. 일본 진주만 습격. 미국의 참전.
1942.11.8.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북 Africa)
이 기간에 본회퍼는 유대인들의 해외 피신을 돕기도 했다.
2. 윤리 원고 집필
1940년 11월에 본회퍼는 독일 남부 뮌헨 근처 에탈(Ettal)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5개월간 『윤리』의 원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윤리』는 1943년 4월 5일 체포 전까지 썼던 단편적인 원고(장)가 사후 Bethge에 의해 모아지고 편집된 책이다. 그러나 『윤리』의 집필 기간은 본회퍼의 정치적 투쟁이나, 독일의 상황이 매우 치열했던 시기이다.
본회퍼는 『윤리』의 집필을 그의 삶의 학문함 과제로 생각했다.
‘옥중서간’에서 본회퍼는 “나는 때때로 마치 나의 삶을 거의 지나간 것 같이 느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오직 나의 『윤리』를 마치는 일 인 것 같다.” (1943.11.15 편지)
『윤리』는 따라서 본회퍼의 신학이 집중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숙고하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문제에 대한 크리스천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크리스찬이 어떻게 책임적으로 세상의 현실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길을 예비하고 있다.
『윤리』가 쓰이던 시기 즉 1940-43년 사이에 본회퍼는 그의 반 히틀러 저항 그룹의 요청과 무관하지 않게 폭 넓은 에큐메니칼 접촉을 위해 세 차례의 스위스 여행, 두 차례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여행을 했다. 1941년 9월에는 그 때 세계교회의 연맹의 총무 비서트 후프트(Vissert Hooft)와 스위스에서 만났고, 1942년 5월 31일에는 스웨덴에서 그곳에 방문 중인 치체스터의 감독 벨 주교를 만나서 연합국의 평화임무와 종전 후의 국제질서에 관한 교회의 책임에 대해 논의했다. 본회퍼의 임무는 연합국에 독일내의 히틀러 전복계획을 알리고, 이 거사의 성공 시 연합국가 정부들이 조속한 평화협정(회담)을 약속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본회퍼의 정치적 투쟁의 가담은 주로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 정보원의 신분을 이용하여 반히틀러 그룹의 대 연합국 협상 창구로 활동하는 것이었고, 히틀러 살해 모의에 가담한 정도는 단순히 그 계획을 아는 자(Mitwisser)였다.
토의>
-어떻게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정권전복을 위한 폭력을 수반하는 계획에 가담했는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정치윤리의 근거는 무엇이었던가?
Vgl. Die kirche von der Judenfrage. (1937.3)
그의 현실이해는 삶에 통일을 주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 신앙과 정치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는 그의 정치적 결단과 행동을 완전히 해명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행동의 모험(Wagnis)을 내세운 것이다.
3. 약혼과 체포
본회퍼는 1943년 1월 17일 당시 스테틴(Stettin)의 신학교후원자의 손녀인 19세의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Maria von Wedemeyer)와 약혼했다. 마리아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아버지가 1942년 2월 8일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서 전사하였고 오빠도 그해 10월 전사한 슬픔을 겪었다. 이 비운의 여인은 훗날 뉴욕에서 1977년 11월 죽기 전 자신과 본회퍼사이의 편지를 공개하도록 허락하였다.
- 1943년 4월 5일 매부 도나니와 뮌헨의 상관 뮬러(Müller)와 그 부인들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게시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1944년 10월 8일까지 18개월 간 군사형무소 테겔(Tegel)에 수감된다. 여기서 그는 친구 베트게와 부모님 등에게 편지를 보냈고, 후에 이것이 베트게를 통해『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가 약혼녀 마리아와 나눈 편지는 훗날 『그녀의 유언에 따라 출간된다.(Brautbriefe Zelle 92』, 한국어 판 『옥중연서』, 복있는 사람, 2013)
본회퍼는 날마다 공습이 지속되는 불안과 절망의 한 복판 중에 감옥에서 1944년 4월 30일부터 신학적 사고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생각에 집중했다.
: 종교 없는 세계, 비종교적 기독교,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등.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에 대한 최후의 암살시도가 실패하고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었다. 본회퍼는 우울한 감옥에서의 나날을 보내며 어두움 속에 섬광처럼 빛나는 신학적 단상에 매달렸다.
: “삶의 완전한 차안성에서야 비로소 믿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네.”(7.21.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 글 중)
테겔 군사형무소
테겔 군사형무소
1944년, 테겔 군사형무소에서
1944.9.20. 초쎈(Zossen)에서 카나리스 제독을 위시한 히틀러 모반에 가담한 자들의 명단이 게시타포에 의해 발견됨.
1944.10.8. 베를린의 프란츠 알버트가의 유명한 게시타포감옥으로 이감.
이때부터는 바깥으로 더 이상 편지를 내보내지 못함.
1945.1.7.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로 이감됨.
부모나 약혼녀 역시 이때부터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음.
1945.4.3. 뮌헨 남부의 플로센부르크(Flossenburg) 수용소로 끌려 감.
4.9. 교수형(Canasis, Oster와 함께). 매부 도나니(Dohnanyi)는 작센(Sachsen)에서 처형.
3주 후 히틀러 자살. 1개월 뒤 제3공화국 패망.
4.23. 셋째 형 클라우스(Klaus)와 매부 뤼디거 슐라이허(Rüdiger Schleicher) 처형.
4.30. 히틀러 자살.
❚본회퍼의 최후- 영원한 자유로의 여행.
1945년 4월 6일 플로센부르크(Flossenburg) 근처 쇤부르크(Schönburg)라는 자그만 마을의 학교 건물에 도착한 사람들은 4월 8일 본회퍼의 짤막한 예배 인도를 경험했다.
그는 “그의 채찍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이사야 53:5)를 읽고 기도했다.
영국군 장교인 베스트(Payne Best)의 전언에 따르면, “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사복 두 사람이 본회퍼를 부르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죄수들에게 다만 한가지이다. 교수대!”
우리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할 수 있다면 치체스터의 감독에게 안부를….” 부탁했다.
종전 후 그의 약혼녀 마리아와 가족은 그의 생사를 알기 위해 수소문 했으나 행방조차 알지 못한 채, 7월 27일에야 아버지 칼(Karl)이 런던으로부터 송출된 방송(추모)을 통해 죽음을 알게 됨.
플로센부르크의 비문에, 남겨진 것처럼 “그의 형제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그는 영원한 자유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시 “자유를 향한 도상의 정거장들”
훈련
자유를 찾아 출발하려거든,
그대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여,
욕망과 그대의 지체들이 그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하라.
그대의 정신과 몸을 순결하게 만들고
정해진 목표를 찾아서
자신을 던지고 순종하라.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유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다.
행위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모험하며,
가능성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용감하게 붙잡아라.
사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곳에서가 아니라,
오직 행위 속에서만 자유가 존재한다.
불안 가운데 주저하지 말고 사건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그대의 신앙이 그대를 뒷받침해 주며,
자유가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감싸 안아 주리라.
수난
놀라운 변화. 강하게 행동하는 손들이 그대를 붙잡고 있다.
무력하고 고독하게 그대는 그대 행위의 결말을 본다.
그러나 안심하고
조용히 그리고 위안 가운데 정의를 강한 손에 맡기면
만족하게 되리라.
오직 순간에 그대가 자유를 맛보는 축복을 받아,
그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면,
하나님께서 자유를 찬란하게 성취하시리라.
죽음
오라, 영원한 자유를 향한 길 위에 펼쳐진 최고의 축제로.
죽음, 우리의 무상한 육신과 현혹당한 영혼의
무거운 쇠사슬들과 방벽들을 치워 주려무나.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마침내 보겠네.
자유여, 훈련과 행위와 고난 가운데서
오랫동안 그대를 찾았다.
죽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그대 자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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