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백교회의 신학교 사역
본회퍼는 1935년 4월 독일에 돌아왔다. 그리고 고백교회의 신학교(준목훈련원)인 핑켄발트(Finkenwalde)신학교의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신학교는 당시 고백교회의 5개 신학교 가운데 하나였고 가장 끝까지 남은 저항운동의 신학적 본거지였다.
첫 학생들 23명이었다. 고백교회에 속한 ‘남은 자’ 그리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시절 본회퍼를 따르던 제자들이었고, 또한 베트게와 같이 본회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온 학생들도 있었다.
1935년, 칭스트에서 수업하던 곳
핑켄발트 신학교 예배당
첫 수업은 칭스트(Zingst)에서 (4.26)시작하고 후에 스테틴( Stetin) 근처의 핑켄발트(Finkenwalde)로 이사(6.24). 이 신학교는 개신교 신학교로서 당시의 상황에 비춰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하나는 그곳이 바로 고백교회 투쟁의 요새(훈련원)였고, 그 별칭처럼, ‘형제의 집(Bruderhaus,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 최초 영성의 집)’ 즉 공동 生活의 실천을 통한 신앙의 비밀훈련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나온 신학적 명상이 『나를 따르라』(1937)와 『신도의 공동생활』(1939)로 출간되었다.
·목적: 신학대학 졸업자들을 불러서 6개월간 설교에 필요한 성서 연구와 주석, 그리고 경건훈련을 시키고 마치면 1년 이상 고백교회의 부목사로서 목회수련(Internship)을 하게함.
·방법/과목/생활
성서가 중심(성서연구, 묵상).
하루일과는 두 번의 예배/ 아침- 예배 후 30분간 명상(침묵).
아침에 강의-토론 후 30분 간 노래 합창으로 오전 일과를 마침,
·과목/성서연구(주석)/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들을 연구/설교학, 신앙문답, 목회상담학, 예배학, 교회학 등
저녁 토의 시간 : 매주 주제는 정세, 정치문제.
제자직에 대한 강의(중심)
날씨가 좋으면 강의를 그만두고 숲이나 해변으로 가기도 하고, 오후에는 정기적으로 스포츠를 즐김
매 달 성만찬을 가지고, 형제들 간의 죄의 고백과 사죄의 시간을 가짐으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개신교적으로 수용함.
·의미/‘형제의 집’ 실천/Vita Communio, 즉 ‘공동생활 실험’을 통한 제자직의 훈련을 위한 것으로, 그 이상은 본회퍼가 이전에 영국에서 미르필드(Mirfield)와 켈함(Kelham) 수도원을 방문하고 받은 감명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형제의 집은 수도원적인 도피나 은둔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봉사를 위한 깊은 내적 집중’의 장소가 되려는 것이었다.
이 신학교는 나치스에 의해 1934년 가을 SS 대장/비밀경찰국장 히믈러(Heinrich Himmler)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하교육으로 지속하다가 1940년 완전히 폐쇄될 때까지 적그리스도 나치스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위한 고백교회의 영적 전쟁의 훈련장이 되었다.
1935년, 핑켄발트 신학교 수료식 날(맨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본회퍼)
❚교회탄압
영도자에 대한 충성서약(맹서) 명령 (1938.4.28)
1938년 6월 11-13일, 구프러시아 고백교회 총회, 조건적으로 결정.
이미 60-80% 목사들이 서약에 대해 본회퍼와 바르트는 괴로워했다.
“결국 깨진 양심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목사들을 생각할 때 심장은 거의 멎는 것 같았다.”(Bethe, DB, 506)
나치스의 탄압의 목적은 고백교회의 파괴에 있었다.
2. 1939년 미국 방문과 귀국
네 번째 광야 여행.
1939년, 런던에서
본회퍼는 1939년 7월 징집될 예정이었다.
이때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교수가 그를 뉴욕 유니온신학교로 초청하였다.
그는 1939년 6월 4일 출국하여 6월 12일 도착하였다.
계획) ·7-8월 유니온 신학교 여름학기 강의
·폴 레만(Paul Lehmann)의 주선으로 미국 여러 대학에서 강연.
·독일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Seelsorge)
독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전쟁이 임박한 것이 전해지자, 돌연 본회퍼는 7월 초 귀국을 결정하고 니이버(Niebuhr) 교수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은 잘못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민족사의 수난기를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운명을 져야 합니다. 만일 내가 이때에 나의 민족과 이 시기의 고난을 같이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기독교 문화의 생존과 독일의 멸망 · 그 역 사이에서 선택」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폴 레만 등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월 8일 귀국길에 오른다. 결국 그는 안전을 버리고 풍전등화와 같은 독일과 교회의 운명을 가슴에 보듬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자유를 찾는 내적인 해방의 배를 탔다. 그는 배 안에서 “미래에 대한 나의 내적 번민은 없어졌다.”고 썼다.
필자소개
강성영 교수
소속 : 한신대학교 신학과
전공 : 기독교 윤리학
학사 : 한신대학교 신학
석사 : 한신대학교 신학
박사 : Ruprecht-Karls-Universitat Heidelberg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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