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자작나무
늦은 밤 성경을 읽는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지난겨울 페테르부르크 교외
길 위에서 만난 자작나무 숲이 떠오른다
눈이 내리는 속에서 더욱 하얗게 빛나던 자작나무들
가지마다 상처 입은 바람을 앉히고 그 위에 눈은 덮이고
눈발 속에서 마른 잎 몇 장 매달려 고요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던 변화산에서 그의 옷이 희고 빛나던 것처럼
희고 빛나는 성자 같은 나무
자신의 살갗을 찢으며 혹한을 견디고 있었다
길 위에 곧게 서서 우듬지가 가늘게 떨리던
목마른 나무
그 상처를 만져보지 않아도 자작나무는 자작나무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눈밭에서 채찍으로 맞은 듯이 부르터 백지처럼 벗겨진 수피
갈피마다 깊은 뜻 새겨놓았는지
말씀을 곱씹듯이 꿈을 꾸며
곤줄박이 박새도 날개를 접고 그곳에 깃들었다
늦은 밤 눈은 내려 허기진 마음
삭정이를 지펴 구워주신 떡은 씹을수록 달다
달리다굼,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자작자작 당신의 몸을 태우는 소리로
네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냐, 혈루증 여인을 돌아보는 부드러운 목소리
어둠 속에서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인다
새순을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따스한 숨결을 느낀다
눈이 그치고 아침이 밝아온다
내 속에 자작나무 한 그루 우뚝하다
밤새 박새가 찍은 발자국이 활짝 열린다
1)누가복음 9장 30절 2)이사야 53장 5절
3)마가복음 5장 41절 4)누가복음 8장 43∼48절
◇류인채 시인 약력=△1961년 충남 청양 출생 △인천대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문학박사 △제5회 문학청춘 신인상 및 제9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신앙시 대상 수상 △시집 ‘소리의 거처’ ‘거북이의 처세술’ △부천광림교회 권사 △경인교육대 외래교수
'이방인 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0) | 2021.03.24 |
---|---|
오래된 울음/이진환 신앙시공모 대상작 (0) | 2021.03.19 |
가죽 성경 /서김상규 (0) | 2021.02.01 |
흰 노트를 사러 가며 - 김승희 (0) | 2019.10.06 |
그 해, 오늘/박소진 (0) | 2019.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