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뭐라도 될 줄 알았다 / 지이산 2018 김유정신인문학상 당선작

헤븐드림 2019. 10. 5. 23:58





뭐라도 될 줄 알았다 / 지이산



석 달 열흘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꽃 소식 지나가고 눈 덮인 산 바라볼 때까지

차만 우렸다 넉 달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엽저가 폭설보다 높게 쌓이도록 차만 우렸다

1년이 지나갔다 누구는 미쳤다고 하고, 누구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누구는 같이 하자고 하고, 

누구는 모른 척 했다 그래도 차만 우렸다


차를 우려 마시면 찻물이 씻어줄 거라 믿었다

몸 안에 가득 찬 울음이 어디로든 빠져나올 거라 믿었다

꽃도 못 본채 1년하고도 석 달이 지나갔다 감자 꽃 하얗게

피었다는 소식에 다시 찻물 올려놓았다 

찻물 끓는 동안 다구를 닦았다 

돌돌 말린 찻잎 넣고 물을 부었다

대나무 향이 올라왔다 적벽대전 하루 전 날처럼

차는 마시지 않고 있다 바람만 바라보았다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적셔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품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노는 일

입으로 마시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뭐라도 뿌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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