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될 줄 알았다 / 지이산
석 달 열흘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꽃 소식 지나가고 눈 덮인 산 바라볼 때까지 차만 우렸다 넉 달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엽저가 폭설보다 높게 쌓이도록 차만 우렸다 1년이 지나갔다 누구는 미쳤다고 하고, 누구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누구는 같이 하자고 하고, 누구는 모른 척 했다 그래도 차만 우렸다
차를 우려 마시면 찻물이 씻어줄 거라 믿었다 몸 안에 가득 찬 울음이 어디로든 빠져나올 거라 믿었다 꽃도 못 본채 1년하고도 석 달이 지나갔다 감자 꽃 하얗게 피었다는 소식에 다시 찻물 올려놓았다 찻물 끓는 동안 다구를 닦았다 돌돌 말린 찻잎 넣고 물을 부었다 대나무 향이 올라왔다 적벽대전 하루 전 날처럼 차는 마시지 않고 있다 바람만 바라보았다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적셔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품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노는 일 입으로 마시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뭐라도 뿌리는 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