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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의 초상 르노와르는 인상파 시대에 있어서도 반드시 인상파적인 기교에만 얽매이지 않았었다. 물론 그 역시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빛의 효과에 대해서 적잖은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는 다만 빛이 쏟아지는 자연 속에서 자연만을 포착하려 들지는 않았다. 빛이 얼마나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또는 인물의 의상을 어떻게 하면 더욱 돋보이게 하는가 등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햇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는 인물을 테마로 할 때, 무엇보다도 빛을 이용하여 색조를 한층 다양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점이 일반 인상파 화가와 구별되는 르노와르 예술의 특징이다. 이 작품은 인상파전 직후의 것으로,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
라꼬 양의 초상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지극히 사실적인 소녀상이다. 당시의 평론가 말마따나 [더 이상 오를래야 더 오를 데가 없을 만큼 고도의 회화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 르노와르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화폭 구석구석에서 번득인다. 1863년은 르노와르가 <춤추는 에스메랄다>로 살롱에 입선한 해다. 이 성공에 힘입어 초상화 주문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초기이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껏 그리고 꼼꼼히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르노와르는 그 성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치 에나멜과도 같은 염색(艶色)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전아(典雅)한 색조가 억제된 감성을 느끼게도 한다. 아카데믹한 작고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엿보이는 초기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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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느 르노와르의 처녀작 가운데 일품(逸品)이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 그린 작품으로 화가로서의 첫발을 기념하는, 이를테면 [기념비적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사냥의 여신(女神) 알테미스, 즉 디아느가 금방 사슴 한 마리를 활로 맞춘 다음, 바위 위에 걸터앉아 노획물을 대견스레 굽어 보고 있다. 이 여신은 별로 신(神)답지도 않게 그려져 있다. 오히려 관능적인 풍만한 젊은 여자, 즉 요녀 같은 인상마저 준다. 이처럼 여체에 충만한 양감(量感)은 선배인 쿠르베의 영향 탓이라고 보여지며, 배경의 나무나 하늘의 느낌은 코로의 자연 묘사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선배들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도 독자적인 기법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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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를 든 소녀 예쁜 소녀를 전경(前景)으로 놓고 상반신 마을 그린 이 작품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한 귀여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유화의 윗부분은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여 눈부시다. 르노와르는 소녀와 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구도(構圖)하고 있다. 소녀나 꽃이 지니는 속성(屬性), 즉 아름답고 밝은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나름의 화사한 색감을 십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화재(畵材)가 아닐 수 없다. 딴은 이 두 소재란 르노와르를 지탱해 주는 주요한 것인데, 후기에는 이 두 주제가 제각기 독립하여 르노와르예술로서 성숙해 갔다. 소녀와 꽃을 잇는 곳에 그려진 부채는 구도상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소녀의 둥근 얼굴과 둥근 부채가 짝지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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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초상 아르쟝뚜유에서 조그마한 뜨락이 있는 집을 전제 내어, 그림에 골몰하고 있을 무렵의 화우 끌로드 모네가 풍경화 제작에 열중하던 손을 멈추고 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린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예술 창작에 심취된 화가의 진지한 모습을 유연한 필촉과 따뜻한 색감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제2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모네와의 우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상주의가 가장 순수하게 추구했던 시기의 화가의 한 기록으로서 퍽 값진 그림이다. 모네는 바로 이 그림 속의 팔레트와 붓으로 <아르쟝뚜유의 다리>등이 지방이 풍물을 즐겨 그려 그 나름의 빛과 색채의 향연을 베풀었다. 여인 초상이 대부분인 르노와르 로서는 특이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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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아가씨 인상파 시대의 르노와르 작품에는 자연의 묘사보다는 인물, 특히 여인을 주제로 한 명작들이 많다. 이 그림도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젊은 시절의 르노와르의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여느 인상파 화가들은 밝은 햇빛 속에 펼쳐진 대자연을 즐겨 테마로 삼아, 밝은 색조를 강조하면서 자연의 빛깔을 추구해 나갔는데, 그에 비해 르노와르는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빛의 효과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 그 나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에서도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역광(逆光) 속에서 젊은 아가씨의 즐거운 독서 삼매경의 한 순간을 잘 포착했다. 얼굴 한 면의 햇 빛 반영이 밝아 싱싱한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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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의 초상 쇼케는 인상파 화가들의 활동과 인연이 깊은 패?reg;런(후원자)이었다.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미술 운동에 대해서 세상은 냉담했고 적의를 품기까지 하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팔릴 ?reg;가 없었다. 르느와르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어렵게 지냈었다. 이러한 시기에 쇼케는 젊은 화가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 주는 최초의 컬렉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르느와르는 먼저 쇼케 부인을 그렸고 다음해에 쇼케 자신의 초상을 2점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다른 한 점은 하아버어드 대학 포그 미술관에 소장) 세잔도 「쇼케의 초상」(1876∼77년)을 그렸는데 르느와르의 기교의 유연성에 비해서 세잔은 구 도의 견고성과 중후한 마티에르가 특색이다. 이는 초상화에서 모델의 개성 표현뿐만 아니라 작 가 자신의 개성이 표현됨을 보?copy; 주는 예가 되겠다. 시대 : 1875년 소장처 : 빈테르투르 오스카 라인하르?reg; 컬렉션 소장 소재 : 캔버스 유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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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잡답한 파리의 노상(路上)에 봄비가 갑작스레 뿌리기 시작한다. 손에 든 우산을 황급히 펼쳐든 사람들, 거리는 한결 더 붐비는 인상이다. 르노와르다운 발랄함과 서민적인 친숙함이 넘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치고는 뭔지 모르게 차가운, 그리고 창백한 톤을 이 그림에서 느낀다. 우산의 아치의 반복과 선 구성의 준엄함, 딱딱한 붓자국의 리듬이 이 화면에서는 느껴지는데, 이는 르노와르가 라파엘로의 예술에 끌려, 이태리의 여행에서 품페이의 벽화(壁畵)에 감복하여 전환기를 맞기 시작할 무렵의 작품이다. 즉 고전 벽화가 지니는 선려(鮮麗)한 색조의 영향을 적잖이 받아 색종(色種)이 줄어들고 있어보인다. 종래의 그 나름의 색조의 융화를 본령으로 했던 그의 수법이 차츰 형체를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옮겨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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屋外에 앉은 여인 [누드를 그릴 바에야 누구나 그 그림을 보고 그 유방이나 등을 만지고 싶도록 그려야 할 것이다.] 르노와르는 그의 만년에 이렇게 술회했다. [매만진다]는 말은 어쩌면 그의 예술적 생애의 [ 키워드 (key word)]일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정말이지 유방과 등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혹이 물씬 풍긴다. 이 그림은 그의 나이 마흔 셋 때의 작품이니까, 이 무렵부터 차츰 옷을 입은 부인으로부터 나부로 옮아가는 시기인데, 후반기에 들어가면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누드를 중심으로 한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화면 가득히 나부를 놓아 삼각형의 구도법을 쓴 이 그림은, 부드럽고 풍만한 육체의 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화면 가득히 채워진 나부의 배치는 삼각형 구도법에 의하고 있으며, 풍요로운 육체의 표현은 르 느와르 특유의 기법에 의해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이 무렵 이후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가 그 린 나부는 점점 원숙해졌으며, 소녀보다는 성인을 모티프로 해서 육체의 풍만한 아름다움을 그렸 다. 사실 르느와르는 이 무렵 종래의 인상파 기법에 한계를 느꼈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탈리아 여 행에서 폼페이나 라파엘로의 벽화, 더욱이 고전파의 앵그르 등에서 얻은 자극에서 연유되었던 같 다. 만년에 그가 화상을 하는 친구 보라르에게 고백한 사실을 들어 당시의 사정을 살펴본다. "1883년경, 나는 내가 하는 일에 큰 장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상주의를 어느 한계까지 추구하였으나, 그 결과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데생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그 당시 함정에 빠져 버렸던 것이었다." 이 말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데생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내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인상주의에 의한 대상의 해체 결 과 르느와르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간의 육체를 통한 인간 자체의 내면 세계의 포착이 불가 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풍경화에 모네와 르느와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말해 주 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체의 표현이 자유롭지 못할 때 르느와르는 표현의 한계점을 느꼈던 것이다. 시대 : 1883년 소장처 : 파리 잰 월터 폴 곰 컬렉션(루브르 미술관) 소장 소재 : 캔버스 유채 |
잔잔하게 시냇물이 쫄쫄거리는 계곡에서 막 목욕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바위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부상이다.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 야생적인 주위 분위기가 젊고 아름다운여인의 육체와는 좀 괴리감(乖離感)을 느끼게도 하며, 따라서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이도 보이지만, 르노와르는 이 대조(contrast)를 역(逆)으로 이용하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거친 터치로 바위들을 그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심산 궁곡처럼 후진 곳에서 이 욕녀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살결이 고운 육체를 드러내고 있어, 더욱 압도되는 듯한 황홀감을 갖게도 한다. 이와 같은 나부의 기법(技法)은 고전파의 영향을 받아 명쾌한 표현으로 옮아가는 시절에 익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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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공원의 그늘, 산책길에서 만난 지인(知人)들의 다소곳한 대화 장면이다. 매우 흔해빠진 일상적인 정경이, 르노와르의 애무하는 듯한 붓의 촉감으로 말미암아, 놀라울 정도로 밝은 빛의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그네>처럼 그렇게 우아한 세계는 아니지만, 서민들의 충족한 생활의 숨결이 그런 대로 눈부신 광휘를떨치면서 밝게 실현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빛의 줄기가 화면의 도처에 명멸(明滅)하면서 나뭇등걸과 오솔길이 한결 아름다운 빛으로 반영되고 있고, 멈춰 서 있는 그네 역시 마치 쾌적한 리듬으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듯이도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르노와르는 자연의 묘사 못지 않게 인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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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리 부부 르노와르의 다정한 벗이었던 화가 시슬리가 결혼한 무렵에 그린 초상화인데, 이 그름은 이른바 초상화의 포즈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자유스러운 모습을 잽싸게 포착하여 다정한 부부상을 부각시켜 놓았다. 이무렵의 엄격한 사실(寫實) 기법 탓으로 부인의 스커트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있다. 남편과 아내를 화면 가득히 채우면서 삼각형 도법(圖法)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있다. 특히 르노와르는 두 인물의 얼굴의 볼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초기의 사실적인 수법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화려한 색조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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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치는 여인 1890년경에 이르면 르노와르의 부인상은 한껏 무르익어 간다. 모델도 점점 더 풍만한 여인이 많아지며, 그런 포동포동한 육체 속에 감각적인 표현이 더욱 여물어 간다. 이 그림에서는 그런 풍만한 여인을 벗기지 않은 채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한다. 이러한 여인의 속성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앉은 의자도 이에 대응하여 화려하고 밝게 칠했다. 그 위에 이그림의 악센트를 넣기 위해 여인으로 하여금 기타를 연주하는 포즈를 취하게 했다. 감각의 풍족함과 양적(量的)인 충실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그림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르노와르의 부인상의 연작(連作)으로 특유의 예술성을 구축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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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아가씨
LA DANSEUSE 1874년 캔버스 유채 142X95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소장 |
음악회에서 음악회에 출연하여 꽃다발을 받은 다음 무대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이다.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소녀와 꽃다발 등 매우 우아한 테마를 극히 아름다운 색조로 나타내주고 있는 이 그림은, 퍽 극명(克明)한 묘사를 하고 있어 상당히 엄격한 사실(寫實)의 화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부터 르노와르는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새로운 화법을 채택케 된다. 즉, 이른바 인상파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무렵에 그는 곧잘 소녀들을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발랄한 젊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 까닭은 소녀의 아름답고 청신하며, 또한 순진 무구함에 당시 매료(魅了)되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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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그스트 르느와르 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프랑스)
르느와르는 1841년 2월 25일 양질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중부 플아스의 리모즈에서 출생하였다. 석공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4살에 파리로 이사와 7살에 기독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난이 더 심해져 더 이상 르느와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님은 13살의 그를 학교에서 데려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기술 훈련소에보냈다. 그가 담당한 일은 도자기의 윗그림 그리기 였다. 이 작업이 결국 평생화가로서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이 훈련소를 다녔는데, 낮에는 이 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료로 하는 드로잉 수업에 가곤 했다. 르느와르는 그 때부터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애칭이 루벤스였다는 것과그를 제자로 삼겠다고 자청했던 이가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 준다. 그의 부모님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싷었지만, 당시 화가라는직업이 가난으로 직통하는 확실한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림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는 결국 부모님의 어려운 선택에 힘입어 20세가 되던 1861년에 국립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화가가 되기로 그와 그의 가족이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그 길은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를 살 수도, 모델을 살 수도 없었고, 먹을 것을 사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당시 글레르의 밑에서 함께 수학하며 촉망받던 의학도이자 부유한 화가 지망생인 바지우의 아파트에서 얹혀 살면서-물론 바지유의 집에 얹혀 산 것은 르느와르뿐만이 아니었다. 모네도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시슬리도 얼마후 같은 건물로 이사오게 된다.-모델료가들지 않는 자연을 직접 그리는데 몰두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훗날의 외광파의 일원으로 묶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르느와르의 운명이 그를 자연에만 몰두 하도록 두지는 않았는데, 운 좋게도 Lise란 18세 소녀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 후 그녀는 그가 31세가 될 때까지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의 전기작품에 자연과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거의 전부가 그녀이다. 글레르의 스투디오를 나와 바티뇰에서 함께 살던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들에게 화가 지망생으로싀 생활은 매우 힘든 것이었다. 매일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자기가 칠하고 싶은물감을 살 돈이 없어, 언갖 색으로 그들의 캔버스를 물들일 순 없었지만, 그들은 꿈을 가지고있었고, 자연에 대한 관찰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햇빛이 쏟아지던 숲 속에서 캔버스를 펼쳐 둔 르느와르와 그의 친구인 모네, 시슬리에게 자연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살롱에서 그들의 작품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느와르의 그림은 고전과 신화로 가득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녹일 수가 없었다. 르느와르는 분개했지만 이런 이유로 자신의 기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870년 흉갑기병대로 2년 간의 프러시아전쟁 기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르느와르는 동료들과 자신들만의 협회를 조직하여 전시회를 열 것을 제의하였고, 그의 총감독 하에 1874년 첫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관람객들은 매우 적었으며, 재정적인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결국 이듬해 재정적인 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작품들을 경매에 부쳤지만 반응은 매우 냉담할 뿐이었다. 그들의 재정적인 힘이 되주었던 부유한 바지유의 전시와 더불어 이 사실은 그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심각하게 재고해야만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무렵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준 화상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뒤랑-루엘 이었다. 그는 프러시아 전쟁기간에 런던에서 처음 모네와 시슬리를 알게 되었는데, 르느와르는 아마 모네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뒤랑-루엘을 통해 르느와르는 다른 여러 화상들을 만나고, 자신의 후원자들을 조직하게 되면서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즉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르느와르는 살롱에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출품하게 되는데, 1878년과 79년 두 차례모두 살롱의 심사를 통과하게 된다. 특히 79년 그는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의 초상>으로 살롱에서 엄청난 찬사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들은 소위 살롱의 검증하에 출품되는 것으로 인싱되어져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르느와르에게 부와 명성을 허락하게 된다.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파리에 갖게 되고 르느와르는 편안하게 작품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0세가 다 된 르느와르에게도 이 무렵에 사랑이 찾아왔는데, 무려 19살이나 연하인 20세의모자상 Aline Charigot가 그 주인공이었다. 1880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서 5년 뒤 그들의 아들 Pierre가 태어나고, 10년 뒤 결혼하게 된다. 젊은 화가 지망생을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이제 더 이상의 시련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그의 명성은 그의 지난날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또한 여러 가지 전개 과정을 거쳐 발전과 성숙, 완성미를 모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알제리, 이탈리아 등으로의 여행이 힘이 되주었다. 그는 아탈리아로의 그림여행을 통해 라파엘과 앵그르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작품에 형태를 잡아 줄 보다 많은 윤곽선을 넣고, 색조를 좀더 차갑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르느와르의 작품의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따라서 인상주의 작품이라기보다 고전주의 작품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그림이 가지는 사랑스러운 질감과 보풀거리는 듯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어두워진 색조와 분명해진 윤곽선은 이전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르느와르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평가들이나 후원자들에게는 낯선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이런 르느와르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르느와르는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여 짙은 색조를 화면에서 격감시켰지만, 고전에 대한 선망은 죽는 날까지 감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드가를 평생 찬사했음에서 보여진다. 기지에 넘치고 날카로우며, 독설적이 성격의 소유자-물론 만년의 르느와르는 마음씨 좋은할아버지로 변하였다고 한다.-르느와르는 유달리 라이벌 의식이 강했지만, 드가에게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그가 매우높이 평가한 앵그르의 기법을 드가가 충실히 재현하여 발전 시켰기 때문이었다. 르느와르 이상으로 드가를 찬미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르느와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변혁을 꿈꾸게 되는데, 자신의 작품에 보다 많은 빛과 밝음, 기쁨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전적 기법과 결합한 그의 이런 새로운 변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이 작품에 대해 살롱 뿐 아니라 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심지어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조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심각한 관절염은 그를 행복 속에만 있게 두지 않았다. 날이 차가워지면 그는 나갈 수도 없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그를 괴롭게 했다. 르느와르가 그의 노녀을 아내와프로방스 지방의칸에서 보낸 것은 아마도 이 영향이 컸을 것이다. 강수량이 매우 적은 프로방스지방의 일기는 르느와를로 하여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에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한 붓은 예전 같은 붓의 터치를 어느정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1916년 그의 아내가 죽고 3년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칸에 살았으며, 80세가 넘도록작품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
음악회에서 음악회에 출연하여 꽃다발을 받은 다음 무대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이다.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소녀와 꽃다발 등 매우 우아한 테마를 극히 아름다운 색조로 나타내주고 있는 이 그림은, 퍽 극명(克明)한 묘사를 하고 있어 상당히 엄격한 사실(寫實)의 화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부터 르노와르는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새로운 화법을 채택케 된다. 즉, 이른바 인상파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무렵에 그는 곧잘 소녀들을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발랄한 젊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 까닭은 소녀의 아름답고 청신하며, 또한 순진 무구함에 당시 매료(魅了)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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