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태양의 각문(刻文) / 김남조

헤븐드림 2010. 11. 20. 08:21




태양의 각문(刻文) / 김남조

가을을 감고 우리 산 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기폭처럼 퍼덕이고 눈 들 때마다
태양은 익은 석류처럼 파열했습니다

당신은 낙엽을 깔고 그리고 향수를 처음 안 소년처럼
구름을 모아 동자(瞳子)에 띄웠고, 나는 한아름 벅찬 바다를 품은 듯
당신과 가을을 느끼기에 한때 죄를 잊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벗었음을 알던
옛날 에덴의 그 억센 경이같은 것이 분수처럼 가슴에 뿜어오르고
만산(萬山) 피 같은 홍엽 --- 만산 불 같은 홍엽 ---
아니 아니 만산 그리움 같은 그리움 같은 홍엽에서
모든 사랑의 전설들이 검붉은 포도주처럼 뚝뚝 떨어졌습니다.

무슨 청량한 과즙처럼 바람이 풍겨 오고 바람이 스쳐 갈 뿐,
사변(四邊) 폐망(廢茫)한 하루의 천지가 다만 가을과 당신만으로 가득찼고,
나는 차라리 한갓 열병 앓는 소녀였음이
사랑한다는 것은, 참말 사랑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 목숨을 숨막히도록 느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 목숨, 아아 응혈처럼 뜨거운 것이 흘러 내리고---
나는 비수(匕首)처럼 하나의 이름을 던져 저기 피 흐르게 태양을 찔렀으니,
그것은 이 커다란 우주 속에서 내가 사랑한 다만 하나의 이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