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역사 간증

시인 구상의 믿음/고통을 딛고 詩에 희망을 걸며 영원을 바라보다

헤븐드림 2025. 3. 3. 07:55
1998년 교통사고로 중환자실 들어가며 "세상에는 詩가 필요해요"
 
구상 시인은 팔순을 넘어서면서 주로 신앙시를 발표했는데, 그 시들을 묶어 2002년 신앙시집 '두 이레 강아지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를 내놓았다.

 

구상 시인의 부인 서영옥 여사.

고희를 넘긴 즈음부터 구상은, 보다 가까이 있는 존재들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족, 가까운 문단 벗들과 친지, 몇몇 아끼는 제자들과 오랜 교유를 해온 성직자들 등 제한된 인간관계에 집중하는 한편 사회활동 또한 필요 불가결한 것만 하는 수준으로 줄여나갔다. 그러나 작품 활동은 여전히 활발히 이어나갔는데, 그 경향에도 변화가 있었다. 가까이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대상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1989~1998년 사이 구상은 시집, 시선집, 5개 국어로 해외에서 출간된 시선집 등 16권의 책을 펴냈는데, 그중 '신령한 새싹' '조화 속에서' '인류의 맹점에서' 등에 나오는 시편들은 이전과 달리 작은 존재가 내재하는 무한성을 노래하는 것이 많다. 아래의 '풀꽃과 더불어'가 그러한 성향의 대표적 예다.

고희 넘어 크나큰 상실의 시기 겪어
1993년 아내 작고·1997년 장남 사망
두 번의 교통사고로 생사 넘나들어
작품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담아
팔순 들어 은총에 눈뜨는 신앙시 써
노벨상 후보 올라 유럽서도 큰 관심
2004년 5월 영원을 향하여 먼 여행|

'아파트 베란다/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잡초가 제풀에 돋아서/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중략) //영원한 무한의 한 표현으로/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이제 여기 존재한다.'

서울 자택 베란다에서 노년의 구상 시인. 고희를 넘긴 즈음부터 시인은 가까이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풀꽃과 더불어'가 그러한 성향의 대표적인 시다.
1990년대 초 시인의 서재 관수재에서.

구상에게 이 시기는 개인사적으로 크나큰 상실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내가 1993년 위암 투병 1년 여 만에 작고하였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97년 장남이 만성 폐질환을 극복치 못하고 타계하였다. 이에 앞서 1987년에 폐결핵을 앓던 차남을 이미 떠나보낸 그이기에 그러잖아도 고혈(孤孑)한 실향민의 외로움에 더해진 상심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95년에서 1998년 사이 그는 길에서 두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해 위중한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특히 1998년의 사고는 그를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했고 승려였다면 임종게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무성(無聲)의 사자후를 터트리게 했다. 단순한 골절상이었지만 지병인 당뇨와 천식에 의한 합병증으로 위급하게 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지던 중 그는 입에 호흡기가 채워져 있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필담을 요구했다. 급히 조달된 작은 메모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죽 한번 둘러본 후 혼수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기사회생하여 여섯 해를 더 살다 갔지만, 그날 구상이 병원 복도에서 남긴 메시지는 가족과 측근들에겐 유언처럼 각인된 가운데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라니!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예감한 노시인이 세상을 향해 외친 그 간곡한 메시지는 실제로 무엇을 함의했던 걸까? 시라는 게 그에게 대체 무엇이기에 그 긴급한 순간에 마지막으로 남기려 했던 말이 그러했을까. 당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 일을 되새기며 궁금해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필자에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불완전하게나마 제시해준 것은 같은 해에 출간된 시집의 표제작 '인류의 맹점에서'이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중략)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무엇일까?'

그는 이 시기에 그를 둘러싼 세계가 암흑기에 처한 걸로 보았고 그 위기를 인지하고 구명을 불러올 조명탄이 바로 시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 시각 자신의 목숨은 스러져가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리도 다급하게 남은 사람들에게 그 신념을 갈파한 것이 그 메시지가 아니었을지….

구상은 70대를 노경(老境)에서만 나올 수 있는 천진한 자연회귀적 통찰과 파괴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인간문명에 대한 성찰로 환희와 번민을 오가는 파우스트적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동안 앞에서 말한 참담한 상실도 겪어야 했던 그는 자신이 지닌 얼마간의 물질적 소유를 불우하고 소외된 이들과 나누는 일에 열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장애인문학회인 '솟대문학'에 넉넉지 못한 문사로선 큰 금액을 기부하여 솟대문학상 제정의 토대를 만들어준 일이다. 또한 이중섭미술상, 공초문학상 등 불우한 시절을 살며 예술혼을 불태우다 간 기재(奇才)들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창설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것도 이 시기에 그가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동원하여 도모했던 일중 하나이다.

2000년대 들어 구상은 팔순 고개를 넘어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은혜라 함은, 청년 시절부터 병마와 싸워 온 그로서는 자신이 20세기를 넘겨 살리라곤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작고하기 얼마 전에 쓴 '저승의 문턱에서'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 스스로가 의아한 이 장수를/그저 신령한 섭리로 감수하며 살지만/오직 가정이나 주변에 더 이상 고통을/주지 않고 데려가시기만 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시들은 주로 신앙시들로, 2002년에 신앙시집 '두 이레 강아지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로 묶여 나온다. 그러한 시편들의 하나인 '은총에 눈을 뜨니'의 첫 구절에서 그는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눈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며 신앙간증과도 같은 고백을 한다. 앞선 시절 어느 때인가 관상 속에서 법열이라 할 만한 선적(禪的) 체험도 해보았다는 그가 새롭게 다다른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작고 전 1년간 거듭된 입·퇴원 중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르내리며 극심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필자이지만 그의 내면 정황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다. 외적으로 볼 때 구상은 마지막까지 인간고에 처절히 시달리다 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늘 트레이드마크였던 자칭 '외면보살'의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한결같이 대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위로를 받고 돌아간 게 사실이다. 추측컨대 이것은 그가 어떠한 도(道)의 경지를 득하여 모든 게 여여(如如)해져서 그럴 수 있었다기보다는 자신을 비롯한 무릇 인간 존재가 지닌 어찌할 수 없는 유한성을 투철히 깨닫고 가엾게 여기는, 그의 평소 표현에 의하면, '우주적 연민(cosmic pity)'에서 나올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 한편 이 마지막 인고의 시간 중에 그는 문학인으로서 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명예의 정점 가까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다가가기도 했다. 노벨상 본심 후보로 두 번째 추천되면서 스웨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문단에서 집중적으로 그의 번역시들에 관심의 눈길을 보내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던 2000년에는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에 임박하여 일본대사관에서 외신통들이 구상의 자택으로 찾아와, 자기들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해 노벨문학상 아시아권 1위 후보가 구상 시인이라고 누설하고 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한 해에 어느 국가에 노벨상이 둘이나 돌아가긴 어려울 터, 그 일은 섣부른 오보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로도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의 정교수이면서 노벨상 추천위원이었던 세계적 중세문헌학자 이득수 교수는 '천둥이 잦으면 비가 오는 법이니 구상 시인의 모든 번역된 작품들을 계속 보내 달라'는 독려 편지를 필자에게 보내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분 또한 구상에 한 해 앞서 급성 간질환으로 세상을 하직하여, 시인이 누리는 지상의 명예는 거기서 그치게 되었다.

오늘 속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 속 오늘을 살고자 했던 시인 구상은 그러한 세상적 성취 너머에다 자기 실존을 걸었던 사람이다. 또한 그는 '우주적 자비(cosmic compassion)'를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눈만 뜬다면'이란 시에서 '저 영원 속에서 나와 저들의 그 완성될 모습을 떠올리면 황홀해진다'며 고유의 존재론을 흔감스레 선포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2004년 5월 어느 볕 좋은 봄날, 그는 영원을 향하여 떨리고 설레는 여로에 올랐다. 영혼의 본디 꽃자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