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덕수초등학교 재학 중 피아노 공부를 위하여 누나들(정경화, 정명화)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이후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부문 2위로 입상하며 국내에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았고 이후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정명훈은 동양인으로서 36세의 나이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현 파리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에 취임할 정도로 일찍이 음악적 역량을 인정받은 지휘자이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첼리스트 정명화의 남동생이기도 하며, 셋이서 피아노 3중주단인 '정 트리오' 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2. 생애
한국전쟁 후반 서울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에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제11번을 협연하면서 신동으로 주목 받았다. 어머니는 자녀들이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산 피난 때 피아노를 트럭으로 실어 갈 만큼 헌신적이었다. 어머니가 명동에서 냉면 가게를 하여 크게 성공했는데 자녀들의 음악 교육을 위해 가게를 팔고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정명훈은 미국에서 계속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고 1967년 시애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다. 1971년 뉴욕의 매네스 음대에 입학했다.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피아노를, 칼 밤베르거에게 지휘를 배웠고, 누나 정명화가 스위스의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참가했을 때 피아노 반주자로 무대에 섰다.
1973년 서독 뮌헨의 ARD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로 입상했다.
1974년 소련의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스타니슬라프 이고린스키와 공동 2위로 입상했다[6]. 한국인이 큰 콩쿠르에서 2위를 한 것은 처음이라 경사로 여겨졌고 콩쿠르 직후 귀국해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특별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주었다. 1973년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시행된 후 예술계와 체육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후 본격적인 피아니스트 연주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해 10월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975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했지만 마이클 휴스턴과 공동 5위를 하는 데 그쳤다. 이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일본 순회 공연에 협연자로 동행했고, 장 마르티농[8]과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도 미국과 일본에서 협연했다.
1975년에 매네스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뉴욕 줄리아드 스쿨에 입학해 본격적인 지휘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음악원 관현악단과 뉴욕 청소년 관현악단 등을 지휘해 무대 경험도 쌓기 시작했다.
지휘자 경력
1980년대 초반부터 뉴욕 필하모닉,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피츠버그 교향악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 지휘하며 지휘자로서의 활약을 넓혀나갔다. 1984년 서독으로 거점을 옮겨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스웨덴의 비스(BIS)와 영국의 ASV, 서독의 코흐(Koch) 등에서 예테보리 교향악단과 잉글랜드 노던 신포니아, 자르브뤼켄 방송향 등을 지휘해 닐센과 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드보르자크의 현악/관악 세레나데 등의 녹음을 취입하면서 지휘자로서 음반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브뤼켄 재임기에는 전임자 한스 첸더의 노선을 따라 기존 레퍼토리 외에 현대음악 작품의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 헬무트 라헨만의 '먼지(Staub)', 윤이상의 교향곡 3번의 세계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오페라 지휘도 이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86년에 파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불의 천사로 메이저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고 같은 해에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뷰했다. 첫 오페라 지휘는 줄리아드 스쿨 재학 시절에 공연한 푸치니의 나비부인이었고,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재단의 도움을 받아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을 지휘하기도 했다.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피렌체 시립 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주 공연하기도 했다.
정명훈의 지휘자 경력이 크게 도약한 것은 1989년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9](현 파리 국립오페라) 초대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가 공식 취임도 전에 해임되었고, 정명훈이 차기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클래식 음악 매니아들은 정명훈과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이 얼마나 뛰어난 연주를 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대다수 파리 관객은 정명훈이 누군지 몰랐다. 거장 바렌보임[10]의 후임으로 무명의 36세 동양인 지휘자가 임명된 것에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윗선에서 다루기 어려운 바렌보임을 자르고 말 잘 듣는 정명훈을 음악 감독으로 앉혔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정명훈은 이전에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리허설 시간 배분에 실패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었고 연습 시간에 민감한 단원들이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도이체 그라모폰(이하 DG)과 계약을 맺게 되면서 초기에 좋지 않았던 분위기는 많이 개선되었다. 도이체 그라모폰은 원래 독일계 지휘자 일색의 레이블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 정책을 펼치면서 유럽과 함께 3대 음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동아시아[11]를 겨냥하여 미국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일본인 오자와 세이지를 영입하여 재미를 봤다. 오자와가 필립스로 이적한 후 오자와를 대신할 동양인 지휘자를 물색하던 DG는 바스티유 오페라의 신임 음악감독인 정명훈을 영입하여 아시아 시장과 프랑스 시장을 동시에 겨냥했다. 데뷰 앨범으로 바스티유 오페라 관현악단과 녹음한 비제의 관현악 모음곡이 출반되었다.
1990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후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 지휘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로린 마젤이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밀려 낙선되자 예정된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다. 이에 정명훈이 로린 마젤의 대역으로 베를린 필에 데뷰하였다.
바스티유 오페라 재임기 오페라 공연을 주로 하며 프랑스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연주에도 힘썼다. 이 시기 DG에서 출반된 앨범도 대다수가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을 담고 있다. 메시앙은 생전 정명훈의 지휘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투랑갈릴라 교향곡 같은 경우에는 직접 음반 해설을 집필하기도 했고 말년에 작곡한 '4인을 위한 협주곡' 을 정명훈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바스티유에 있는 동안 플라시도 도밍고를 타이틀 롤로 기용하여 베르디의 오텔로 명반을 남겼다. 90년대 당시 오페라 녹음 관행에 따라 정명훈은 성악진 없이 오케스트라만 지휘하여 녹음했고, 도밍고 등의 성악가들은 별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여 음반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음악적인 이유보다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이유라고 알려져 있다.
몇 년 간 일정한 포스트 없이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96년 로린 마젤이 취소한 연주회 대타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에 데뷔했다.
1997년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지역 악단 단원들을 비시즌기에 모아 조직하는 페스티벌 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산타체칠리아 외에도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에서 객원 지휘자로 무대에 올랐다.
1998년 한국 KBS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단원과 경연진 양쪽으로 심각한 불화가 발생하여 취임 한지 불과 두 달 여 만에 사임하였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퍼져 있는데, 우선 악단의 기량과 오디션 문제가 주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부지휘자 선임 건 또한 주요한 이유라고 한다. 정명훈의 한국 체류 기간 이외에는 악단을 트레이닝할 인물이 없다보니 그 대안으로 정명훈은 한 외국인 지휘자를 부지휘자로 추천했지만 당시 IMF의 여파가 컸던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으로서는 외국인 부지휘자 선임은 비용면에서 큰 무리가 따랐다. 경영진과의 불화 뿐만 아니라 단원들과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까지 겹쳤다. 리허설 도중 단원들과 고성과 반말이 오갔다는 소문이 당시에 퍼지기도 했다.
2000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일설에 의하면 2001년 임기를 마치는 샤를 뒤투아의 후임으로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음악 감독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단원 일부가 정명훈의 연습 스타일을 반대했고,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정명훈을 적극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했다. 바스티유 시절처럼 메시앙의 관현악 작품 음반을 계속 출시했다. 스트라빈스키와 라벨, 베토벤, 드보르자크, 무소륵스키 등의 작품도 음반으로 취입했다. 2001년에는 소니의 CEO이자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대규모 악단이 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단 이사장이었던 오가 노리오의 부탁을 받고 특별 예술 고문에 부임했다.
2005년 한국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 감독 겸 상임 지휘자에 부임하여 2015년까지 재임했다. 한국 관객들은 환호했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명훈 개인의 경력으로는 기세가 살짝 꺾이는 계기가 되었다. 부임 직후 대대적인 오디션을 진행해 전체 단원의 1/3 가량을 교체하면서 타성에 젖어 있었다고 비판받고 있었던 악단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단원들과의 갈등도 심했지만, 오디션 후 젊고 역량있는 신진 연주자들과 관악 파트의 적극적인 외국인 단원 영입으로 확연히 향상된 연주력을 보여주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2009년에는 DG와 5년에 걸쳐 매년 두 장씩의 앨범을 발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서울시향 부임 이후 활동 중심이 한국으로 많이 쏠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해외 악단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관현악단인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지휘했다.[12] 2010년에 도쿄 필에서 퇴임한 뒤 계관 명예 지휘자로 계속 악단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1년에는 빈 국립 가극장(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하여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했다. 2012년부터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가 새로 신설한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었으며, 서울시향에서 했던 것처럼 해당 악단과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진행하였다.
2010년대 북한과 음악 교류 사업도 추진했다. 추석 연휴 중이던 2011년 9월 12일에 서울시향 행정 직원 두 사람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 계획은 이전에도 있었는데, 1990년 여름에 공연 제의를 받았지만 한국 정부의 방북 허가가 나지 않아 무산되었다. 2006년 10월에도 윤이상관현악단을 지휘하러 갈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북한에서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주로 어린이 음악 교육과 남북 관현악단 교환 공연 등 행정 사안을 논의하기 위한 방문이었고, 일정 중 조선국립교향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허설 참관 중에 잠깐 지휘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방북 성과는 이듬해인 2012년에 은하수관현악단의 창단 이래 첫 해외 공연으로 나타났다. 3월 14일에 파리의 살르 플레옐에서 진행된 공연의 2부 순서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과 합동으로 연주한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앙코르 두 곡을 지휘했다.
12년만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다시 초청되어 2013년 10월 18~20일 메시앙의 네 개의 교향 명상 '승천' 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을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무산되었다.[13][14][15] 이후 2014년 5월 8~10일 베를린 필 무대에 13년 만에 다시 출연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과 진은숙의 첼로 협주곡,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
2013년 1월 25일 서울시향과 바그너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공연을 약 세 시간 앞두고 급성 요통이 발병해 급작스럽게 취소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회복한 뒤로는 예정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7월에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자식들과 손녀를 위해 직접 선곡한 첫 피아노 독주곡집 녹음을 ECM 스탭들과 제작했고, 해당 녹음은 12월 말에 출반되었다. 같은 달 라 페니체 극장으로부터 평생음악상을 수상했다.
2015년 5월 서울시향과 바그너의 '발퀴레'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공연 한 주 전에 정명훈이 목 디스크 통증을 이유로 연주를 고사하고 대신 지휘자 콘스탄틴 트링크스가 투입되어 연주를 마쳤다. 다행하게도 트링크스가 지휘한 이 날 연주는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호평이 지배적이었다. 더불어 무대에 긴 시간동안 있어야 하는 오페라 지휘는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서울시향뿐만 아니라 라 스칼라 극장 등에서의 오페라 연주 일정도 취소하였다.
2015년 6월 라디오 프랑스 필에서 상임지휘자로서 마지막 공연을 지휘했다. 연주 이후 정명훈은 악단 최초의 명예 음악감독(Directeur Musical Honore)으로 추대됐다.[16]
2015년 8월 아래에 서술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을 사임하고, 남은 계약기간 동안은 무보수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2015년 12월 29일, 결국 서울시향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2016년 이후 스케쥴을 모두 취소하였다.
2016/2017시즌 시작과 함께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음악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정명훈의 삼남 정민이 이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선임되었다.
2016년 11월 빈 필의 서울 공연을 지휘했다. 정명훈이 빈 필의 2016 아시아 투어를 이끌었다고 기재되었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명훈은 11월 1일, 2일 양일간 열린 서울 공연 2회만 지휘했으며, 이에 앞서 10월 일본 5개 도시에서 열린 8차례의 빈 필 공연은 모두 주빈 메타가 지휘했다.
서울시향에서 사임한 후 한국에서의 활동이 크게 줄었으나, 2017년 8월 롯데 콘서트홀 개관 1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아시아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뉴스가 나왔다. 롯데 콘서트홀 측이 아시아 필과 함께 정명훈의 출연을 요청했으나, 정명훈은 아시아 필 대신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해서 창단 공연을 가졌다.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남북한의 연주자들의 합동 공연을 위해 창단했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목적으로 롯데문화재단과 원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 창단에 합의했다. 원래 롯데문화재단은 롯데콘서트홀을 개관할 때 사회공헌 및 국내 영재음악인 육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겠다고 했었는데, 정명훈을 영입하면서 남북 화합을 기원하는 원 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로 목적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월 1일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기사
2018년 1월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원 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 창단공연을 지휘했다. 창단연주회에 앞선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북한의 불쌍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정치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북한 음악가들과 함께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한광규 롯데문화재단 대표는 일단 상설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것은 아니며 "일단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 언제까지 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8일 이탈리아에서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나 3월 16일부터 25일까지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던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지휘가 취소되었다. 큰 사고는 아니며, 이미 퇴원했고 2주 정도의 요양 후 복귀가 가능한 상태라고 보도되었다.
2018년 3월 대한민국 정부가 정명훈에게 4월 북한에서 지휘가 가능한지 문의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정부의 이같은 문의에 대해 정명훈은 남북의 화합을 위한 일에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2018년 4월 27일 예정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지휘를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보르 볼튼(Ivor Bolton)이 정명훈을 대신해 공연을 지휘했다.
2018년 9월 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남북화합을 위한 평화콘서트를 지휘했다. 남북 평화 기원하는 의미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을 선곡했다고 밝혔다.북한 성악가가 협연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으나, 결국 불발되었다.
2018∼2019시즌 라 페니체 극장의 개막작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를 지휘했다.
2018년 12월 6~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도이치 그라모폰(DG) 120주년 기념 갈라 콘서트'를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5일전인 1일 이를 취소하였다. 비행기 탑승을 비롯해 일체의 여행을 삼가라는 주치의의 권고를 듣고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정명훈을 대신해 리오넬 브랑기에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2019년 1월 1일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2년 연속 지휘했다.
2019년 8월 18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의 세번째 공연을 지휘할 예정이다. 1부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의 협연자가 공연 17일 전까지도 공지되지 않아 본인이 직접 연주한다, 김선욱이 오는게 아니냐, 새로 발굴한 피아니스트다 말이 많았지만 공연장에서 정명훈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에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있어서 협연자로 섭외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소속사 권유로 정명훈 본인이 직접 피아노 협연자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2019년 8월 21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교보 노블리에 콘서트’에서 19년만에 부산시향을 지휘했다.
2019년 9월 19일 전남 순천에서 열린 제4회 순천만국제교향악축제에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019년 9월 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한국-싱가포르 투어를 지휘했다.[17]
2019년 10월 16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교보 노블리에 콘서트'에서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2019년 12월 14일 포항 효자아트홀에서 포스코의 송년음악회인 ‘기업시민 POSCO 문화콘서트’에서 연주했다.
2020년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 지휘를 3연 연속 맡게 되었다.
2020년 1월 4일, 5일 이틀간 대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신년음악회에서 서울시향 지휘를 맡는다. 협연자는 클라라 주미 강
2020년 3월 7일 예정된 이탈리아 피렌체의 마지오 뮤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 공연을 취소했다. 정명훈은 2월 19~23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오페라 ‘카르멘’을 지휘하고 이탈리아로 귀국한 후 코로나19 우려로 증상은 없지만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5일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협연자로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롯데문화재단 주최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하며,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함께 임윤찬 피아니스트와의 협연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2023년 11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이끌고 임윤찬, 클라라 주미 강과 협연해 7회에 걸쳐 내한공연을 지휘했다. 이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정명훈 지휘로 7회나 연주하는 것도 놀랍지만 더 대단한것은 뮌헨필이 월드투어가 아닌 오직 한국만을 위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악단의 정명훈에 대한 존경심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악단이 한국 시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24년 7월에 피에타리 잉키넨에 이어 차기 KBS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에 내정되어 2025년 부터 지휘봉을 잡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무려 27년만에 KBS 교향악단으로의 복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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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1979~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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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 수석지휘자 (198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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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테아트로 콤뮤날레 수석객원지휘자 (1987~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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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1989~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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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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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특별 예술고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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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200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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