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의 연주로 듣는 "생상스"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정경화"연주의 "생상스"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
-"정경화"연주의 "생상스"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동양인 클래식 연주자로서 전례가 없는 국제적 인지도와 활동 영역을 일군 선구자적 인물이며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여제 및 대거장 이라고 할수 있다.
2. 약력
9살 무렵에는 이미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할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해 있었고, 13세 때 미국 줄리아드 스쿨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녀의 스승은 '명 조련사'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반 갈라미언으로 이작 펄만, 핀커스 주커만, 마이클 라빈 같은 일급 연주가들을 길러내, 그때까지 러시아 아우어 학파가 주도하던 바이올린 계를 미국 줄리어드 학파로 뒤바꾼 일등 공신. 참고로 그의 뒤를 이어 줄리어드에서 장영주를 비롯한 숱한 일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내고 있는 도로시 딜레이도 그의 제자다. 이 수학 기간 중 갈라미안 이외에도 요제프 긴골드와 폴 마카노비츠키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1967년 미국의 권위 있는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했다. 이후 정명화/정명훈과 함께 백악관에서 리사이틀을 갖기도 하고, 병환 중인 나탄 밀스타인을 대신해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순회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1969년에는 지난 세대의 유명 연주가였던 말년의 요제프 시게티를 만나 짧은 가르침을 받는데, 갈라미언이 바이올린의 표현력과 기교를 가르쳤다면, 시게티는 음악 전체의 흐름을 읽는 법, 음악을 넘어 미술과 문학등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등 정경화의 예술적 깊이를 넓히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시몬 골드베르크 밑에서도 잠시 수학했다.
1970년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연주로 런던 데뷔를 하는데, 이 날의 연주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순식간에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유명 클래식 레이블인 데카에서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으로 첫 음반을 녹음했고, 그 데뷔반의 성공으로 데카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한다. 이어지는 몇 년간 그녀의 커리어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 권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유명 지휘자 대부분과 협연을 펼치며, 일 년에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하는 세계적 연주가로서의 입지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1984년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게트와 결혼, 이후 연달아 두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들 양육과 건강상의 이유로 한 동안 활동을 대폭 줄이면서, 이후의 커리어는 양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70년대 후반에서 결혼 전까지의 전성기에 못미친다는 평이지만, 음악적인 성장은 계속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88년에 또 다른 메이저 음반사인 EMI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했으며, 89년에는 슈트라우스/레스피기 소나타 녹음으로, 94년에는 바르톡 협주곡 2번 녹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음반상 중 하나인 그라모폰 상을 수상했다. 1992년 정 트리오가 유엔 마약퇴치친선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지휘자 솔티 팔순 기념 연주회, 95년에는 지휘자 불레즈의 칠순 기념 콘서트에 독주자로 초청되는 등 일급 독주가로서의 행보를 유지했다. 97년에는 국제무대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시리즈를 한국과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열었다.
2005년 한국에서 공연 리허설 중 왼손 부상을 입어 한동안 독주자로서의 활동을 중단했으나, 2010년 한국에서 아쉬케나지와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며 무대 복귀를 알렸으며, 2011년 대관령 국제 음악제에서의 연주와 일련의 독주회를 가졌다. 2007년 모교 줄리어드 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012년에는 이화여대 명예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언니 정명화와 함께 공동으로 대관령 국제 음악제의 예술 감독직을 맡는 한편 주로 한국에서 왕성한 리사이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3년 말에는 일본과 중국, 타이완에서 순회 연주회를 했고, 2014년 말에는 런던 데뷔 무대였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대대적인 컴백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도 재개했다. 2015년에는 베토벤 소나타로 이뤄진 프로그램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순회 연주를 했으며, 샹하이 필하모니의 시즌 오프닝을 브루흐 협주곡으로 열었다.
2016년에는 워너 클래식(구 EMI)과 계약을 맺고, 첫 녹음으로 평생의 숙원이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녹음했으며, 동해 7월에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프닝을 브람스 협주곡으로 열었고, 새 바흐 앨범 발매 즈음에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바흐 무반주 전곡 프로그램으로 순회 연주를 가졌다. 2017년 5월에는 런던 바비컨 센터와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리사이틀로 바흐 무반주 전곡 연주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2017년 영국의 유력 음악지 그라모폰이 독자 투표로 뽑는 '명예의 전당'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2월 영국에서 녹음한 새 음반 '아름다운 저녁'이 2018년 봄에 출시되었다.
2018년 1월에 언니 정명화와 7년간 공동으로 맡고 있던 대관령 국제 음악제의 예술감독직을 떠나며, 보다 왕성한 해외 활동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2월에는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하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협주곡을 공연했으며 6월에는 떠오르는 스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의 듀오 리사이틀로 성공적인 순회 연주를 가졌다.
정경화 면모
정경화는 줄리어드 악파 출신다운 고른 테크닉과 깔끔하고 아름다운 음색, 그리고 스승 갈라미언이 가르친 절도있고 유연한 활 기술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 연주가로, 음악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완전히 몰입해 자신을 불태우는 것을 이상적인 연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연주는 늘 대단히 정서적이며 내밀한 경험이 되는데, 지적이고 객관적인 연주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자기도취적이라고 비판받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취향을 떠나 독주자로서의 강렬한 존재감에 있어 그녀에 비견할 만한 연주가가 많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불꽃 튀는 열정의 연주가'로 표현되지만, 사실 연주가로서 철저한 컨트롤이 바탕이 되지 않은 열정은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마냥 열정적인 활질로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연주가 자신은 지치고 듣는 관중도 쉽게 질려버리기 십상이다. 정경화는 정확한 리듬 감각, 탁월한 집중력, 이미 데뷔 초부터 평론가들이 '마치 여러 사람들의 다른 목소리를 한 악기로 연주하는 듯'하다고 표현한 다채로운 음색, 시게티로부터 배운 음악 전체와 앙상블을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열정을 조절할 수 있는 연주가다. 조금 더 그녀의 이런 면모를 살펴보려면 흔히 언급되는 낭만주의 협주곡보다도 20세기 작품이나 느린 악장의 연주를 들어보길 권한다. 난해하고 모호해지기 십상인 바르톡이나 스트라빈스키를 뜨거우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내고, 바흐의 느린 멜로디가 마치 영원히 지속되는 듯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이미 언급한 엄격한 음악적 자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열정의 연주가'라는 타이틀이 주기 쉬운 오해대로 그녀가 본능과 감각에 주로 의지한 비이성적인 연주가였다면, 데뷔 후 40년이 넘도록 매번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신선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경화가 연주 시에 시전하는 아름다운 몸동작도 또 하나의 백미. 이전 세대 연주가들은 보통 내내 한 자리에 서서 표정하나 안 바꾸며 연주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에 비해 마치 온 몸으로 연주하듯 역동적인 정경화의 연주 모습은 데뷔 초부터 자주 언급이 되었다. 전 분야에 걸쳐 요즘 젊은 연주가들의 몸동작이 상당히 커진 경향이라 더 이상 그리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전 이후 세대 연주가들을 통틀어도 정경화는 연주 모습이 유독 아름다운 연주가라 할 수 있다. 사실 한 쪽 턱 밑에 악기를 끼우고 연주한다는 것이 그다지 자연스런 자세가 아닌지라, 상당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고개나 어깨가 경직된 경우가 많다. 턱으로 악기를 짓누르며 고개는 지판을 향해 고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정경화는 얼굴과 턱에서 악기와 어깨에 이르기까지 경직된 부분이 하나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연주를 하며 얼굴이 정면을 보든 지판을 바라보든, 몸 전체를 움직이거나 때로는 무대를 발로 구를만큼 흥분하는 순간에도 악기를 턱으로 고정한다는 느낌 없이, 마치 바이올린이 자연스레 몸에 일부분인 듯 하다. 어릴 때부터 바른 자세를 제대로 배우고 연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음악가는 오직 음악으로만 말한다고 하지만, 사실 무대 공연가로서 몸에 경직된 부분이 없이 자연스러운 편이 관객들이 보기에도 편안하고, 연주가 자신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막힘 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경화는 비주얼한 (속된 말로 비디오가 되는) 연주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식으로 출시된 영상물은 멘델스존과 베토벤, 월톤 협주곡 정도이지만, 7,80년대에 영국과 독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공연 영상이 상당수 되는 편이며, 최근 유투브에 개인 팬들이 올린 자료들로 확인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 그리고 '여성'이란 화두
한 명의 음악가로 평가할 때는 국적이나 성별을 거론하는 것은 득보다는 실이 많겠지만, 개인으로서의 인생 역정을 살피는 데에는 그 둘을 떼어놓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인이며 여성이라는 점에서 정경화의 업적이 더욱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 하다.
요즘에야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한국인 음악가를 만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정경화가 음악을 처음 배우던 1950~60년대에 한국은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후진국이었다. 그런데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어린 아이에게 진지하게 음악을 가르친다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정경화의 음악적 성장이 너무나 빨라 어떤 바이올린 선생도 오랜 기간 가르칠 수 없었다는 일화는 정경화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의 음악 교육 수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천재성과 노력 그리고 가족의 희생으로 감내해야 했다. 권위적인 군사정권 시절이던 당시 한국 정부는 그들이 필요할 때는 '천재 소녀'로 치켜세우며 일본과 동남아 문화 사절단에 공연자로 동원했지만, 정작 정경화 쪽에서 정부의 힘이 필요할 때에는 나 몰라라 도와주지 않아 무척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유학을 떠나야 하는데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는 등.(1988년 서울 올림픽 직전까지, 한국 국민에겐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물론 이방인으로서의 미국 생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의 잊혀진 전쟁중 하나인 6.25전쟁이후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잘 모르던 미국의 교수와 음악인들은 정경화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엔 영어도 거의 못했던 그녀는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이상한 발음으로 출석을 부르는 거에도 대답을 못할 만큼 수줍음을 탔다고 한다. 유학하는 자녀들 뒷바라지를 위해 식당을 운영한 부모님을 들어 아이들은 그녀를 '쿠키 (cooky)'라고 놀렸다. 훗날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엔 그게 그렇게 듣기 싫었다"고 회고한다.
스승 갈라미언은 정경화를 아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정말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독주자가 되려면 결혼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당부가 기우가 아닌 것이, 이전 세대의 여성 연주가들은 대부분 결혼이나 출산과 함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정경화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가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나가겠다 했을 때에도 갈라미언의 반응은 "(자신의 또 다른 제자인) 주커만도 나가는데, 여자인 널 우승시켜 줄리가 없다"였다고 한다.
갈라미언의 예상대로 콩쿠르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핀커스 주커만은 당시 미국 바이올린계의 대부이자 음악계 마당발인 아이작 스턴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비등한 실력을 보이는 정경화에게 무언의 압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결승 연주시 보통은 제비뽑기로 연주 순서를 정하지만, 그런 절차 없이 정경화에게 첫 번째 순서를 배정해 버렸다. 그러나 결승 연주에서 모든 것을 보여준 정경화는 다른 결승자들의 연주는 들을 것도 없이 대기실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긴장한 주커만은 결승에서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스턴의 압력으로 결승 연주를 다시 한 번 치러야 하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고, 결과는 무려 주커만과 정경화의 공동 우승으로 정해져 버렸는데 역시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부정할 수 없는 실력차이에도 '동양인' '여자'에게 우승자 타이틀 달아주기 싫다고 얼마나 이 악물고 애를 쓰며 억지를 부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콩쿠르 우승 후에도 음악계 유태인 군단과 연결된 주커만은 레너드 번스타인 등과 이미 음반 작업을 했지만, 정경화에게는 굵직한 기회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유럽행을 택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의도도 컸을 것이다.
성공의 첫 신호탄이 되는 1970년 런던 데뷔 역시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아내의 출산으로 자리를 비운 이작 펄만의 대타로 연주하게 된 기회였는데, 협연할 런던 심포니의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리허설에 참석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몇 명 없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상의도 없이 대타를 보낸 것에 심통이 나 있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은 그냥 취소를 하자고 제안했다고. 그러나 정경화는 "설마 런던 심포니가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모르겠나? 마에스트로도 잘 아는 곡일테니, 그냥 해보자"라고 답했다 한다. 무명 연주가가 런던의 일급 무대에 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는 그녀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을 터. 제대로 된 리허설도 없이 시작한 공연은, 오히려 바로 그 때문인지 더 높은 긴장감과 역동성이 강조된 연주가 되었고, 이 날의 센세이셔널한 성공으로 정경화는 일약 스타 연주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이 곧 사람들의 편견에서 그녀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론의 속성상 작은 아시아 여자가 서양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정경화를 묘사하는 단어들을 보면 그 논조를 짐작할 수 있다 - '차이나 돌[17]', '작은 소녀', '이국의 공주' 등등. 73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와의 인터뷰에서 정경화는 "(데뷔 초에) '저런 조그만 한국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80년 미국 피플 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나서면 아무도 내 연주를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죠. 그러니 무대에서는 터프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요."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의 사진 자료들을 살펴보면 데뷔 초 긴 생머리에 소녀 티가 가시지 않은 모습에서 80년대에 이르러 사자머리 파마에 매서운 표정을 한 모습으로의 변모를 볼 수 있다. 물론 언론은 그에 맞춰 재빨리 '중국 도자기 인형'에서 '암호랑이'로 별명을 갈아치웠고... 요즘에는 야니네 얀센, 힐러리 한, 율리아 피셔 같은 여성 연주가들이 남성 연주자들보다도 더 잘나가는 바이올린계지만, 거의 20년 연하인 안네 소피 무터나 빅토리아 뮬로바 같은 연주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경화와 비견할 만한 경력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없었다는 점만 봐도 당시 그녀가 이룩한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공의 절정기를 달리던 1984년 정경화는 형제들 중 가장 늦게 결혼을 하게된다. 연평균 10개국 22도시에서 120회의 콘서트를 여는 독주자로서 가정 생활을 택하는 것은 적잖은 모험이었다. 실제로 연이은 두 아들의 출산후 건강이 악화되어 몇 년간 활동을 못했고, 이후에도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활동량을 대폭 줄이게 된다. 두 아들을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만큼 자식 사랑이 극진한 정경화이지만, 89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정 생활과 연주 생활을 모두 지켜내려는 노력에도) 모든 것을 얻은 듯하지만 또한 어느 것도 얻지 못했다"라고 토로하기도 한 것을 보면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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