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뭔데>는 슬하에 천지만물을 두고 애지중지 보듬으며 사는 사람 전우익의 14개의 토막글이 친근감 드는 몽당연필처럼 각 꼭지 끝에 달려있는 책이다. 김용준 선생의 <근원수필>을 읽은 이야기, 도연명·노신의 삶과 작품 이야기도 고졸(古拙)한 어투로 들려준다.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남아나질 않는 자연을 안타깝게 목도하는 젖은 눈도 언뜻 엿볼 수 있다.
[사람이 뭔데]-소로우의 [월든]보다 더 깊은 [월든]
이번에 펴낸 세 번째 책 [사람이 뭔데]는 7년 만에 나온 것이다. 2000년 9월에 개정증보판[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가 나왔지만, [호박이……] 이후로는 세 번째로 나온 것이다.
서문의 "맨날 해봤자 그놈의 소린 그놈의 소릴 수밖에 없는데 또 지껄였습니다. 너절한 삶과 천방지축으로 읽은 책 이야길 썼습니다."라는 말마따나 이번 책은 이전의 두 책과 많이 닮았다. 14개의 토막글이 친근감 드는 몽당연필처럼 각 꼭지 끝에 달려있는 것이 이번 책의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 김용준 선생의 [근원수필]을 읽은 이야기, 도연명·노신의 삶과 작품 이야기도 고졸(古拙)한 어투로 들려준다.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남아나질 않는 자연을 안타깝게 목도하는 젖은 눈도 언뜻 엿볼 수 있다.
7년 만에 끌러놓는 지혜보따리엔 참으로 낯익은 것들이 많다. 세월을 살되 세월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진한 삶이라 했다(『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중에서). 세월에 얽매이지 않고 살다 보니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이 모습이 변한 것 없이 한결같은가 보다.
그이는 슬하에 사람 자식으로 3남3녀를 두었다. 모두들 외지에 나가 살고 아내마저 오래 전에 떠나 보낸 그이는 할아버지代부터 살던 낡은 기와집에 홀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 이만하면 외로움을 느낄 만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이 슬하엔 사람 자식 외에도 자식이 또 있다. 앞마당의 30여 종의 나무(『호박이……』의 54쪽 '재산공개' 부분에 나무 이름이 나온다.)도 그이가 키우는 자식이고, 철마다 마당 안을 드나드는 들꽃·철새도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그이의 너른 슬하엔 사람 자식만이 아니라 천지의 많은 것이 품어져 있다. 이처럼 천지자연과 정분난 그이는 살림살이가 비록 구차하여도 사계절이 있어 삶이 풍요롭다 말한다.
화물로 도착한 묘목이 비닐봉지에 대충 싸여 상처 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묘목을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 포대기를 안 싼 채 화물차 태워 오백 리 길 오게 한 것을 누누이 가슴 아파하며 후회하는 모습은 새끼를 아끼는 어미의 모습을 닮았다.
봄이 되어 제비꽃 핀 걸 보면서도, 제비꽃 피면 으레 오던 제비가 공해 때문에 제철에 못 오자 주변 사람들에게 제비의 안부를 묻는다. 마당에 앉아 태산 같은 안도감을 주었던 소가 요즘은 무기징역수가 되어, 싱싱한 풀 한 번 뜯지 못하고 사료만 먹은 채 이승을 떠나는 현실 또한 가슴 아파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안위가 궁금하고 염려스러워, 혼잣말로도 "인간이 뭔데, 사람이 뭔데, 내가 뭔데……"를 되뇌며 인간의 파괴적인 손길에 몸서리를 친다.
이 땅에 사람만 사는 게 아닌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넬까? 그이 말이, 주인 행세하려고 기를 쓰는 쪽이 나그네 같고 아무 말 없는 쪽이 주인 같다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야말로 큰 소리 칠 입장이 아닌 나그네이지 않을까?
본문 소개
많은 모종이 죽었으나 살아 있는 나무 덕분에 벼락부자가 된 것 같이 마음이 뿌듯했어요. 돈 부자가 되었으면 불안할 텐데 나무 부자는 마음이 편해요. 모두 다 보고 감출 게 없으니까요. -<나무 심는 즐거움> 중에서
함박꽃 핀 건 저한텐 큰 경삽니다. 줄기 자르고 옮겨 심는 걸 싫어한다기에 퍽 조심하면서,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훔쳐봤어요. 줄기와 가지, 이파리도 멋져요. 꽃은 며칠밖에 못 가네요. 미인박명이라 그런가요? 잎이 오래 가고 담담해서 가슴 설레게 하지 않아 두고두고 볼 수 있습니다. -<함박꽃> 중에서
야구 섬 산 깊은 곳에 서있는 줄무늬 삼나무는 수령이 7,200년 되잖나 싶답니다. 오래 사는 게 삶의 목표는 아니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산 나무는 예사롭지 않은 존재 같답니다. 그 앞에 서면 존재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답니다. 크고 오래 묵은 나무는 늙음과 젊음을 더불어 살고, 삶과 죽음을 함께 안고 있답니다. 이 나무는 이미 살아야겠다고 발버둥 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다만 하늘과 땅을 우러러 조용히 기도 드리고 있는 것 같답니다. 그러한 생명 앞에 섰을 때, 우리 마음도 조용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줄무늬 삼나무> 중에서
무로마지 시대에는 여러 가지 목수 연장이 발명되어 대패도 나오고 판자도 톱으로 켜는 등 편리한 것을 좇게 되는데, 그러면서 기본을 잊어버리게 되었답니다. 물건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계산하고 능률이 중요시되더랍니다. 그 전까지는 연장이 보잘것없다 보니 판자도 쪼개 만들어야 하므로 토막마다 만져봐서 나무의 성질을 살피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답니다. 자연, 나무의 성질을 꿰뚫어보는 훈련을 쌓게 되는데 여러 가지 목수 연장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일도 사라져 버렸답니다. 창대패가 사라진 것도 무로마지 시댄데 편리한 것이 나오면 사라지는 게 생긴답니다. 어떤 연장이 없어진다는 건 그 연장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 연장으로 이루어진 문화도 함께 사라진답니다. -<목수가 본 자연과 건축> 중에서
같은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절대로 착한 일 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눈에 뜨이는 지독한 나쁜 짓이나 하지 말고 살아 보자는 부탁입니다. -<제비와 제비꽃> 중에서
툭하면 세상 탓하는데, 우리가 날마다 쳐다보는 해와 달은 구름에 가려도 몇 며칠 장마가 져도 빛나지요. 구름 끼었다고, 비 온다고 모습 바꾸지 않지요. 제 모습 갖지 못한 놈 세상 탓합니다. …… 바람이 세게 분다고요. 저의 집에서도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엔 앞산 나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같이 들립니다. 송뢰란 소나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천뢰란 천지자연의 소리랍니다. 사람으로 살기조차 힘겨워 사람의 소리마저 제대로 못 듣고 자연과 멀어지다 보니, 자연의 소린 더더욱 못 듣게 됩니다. 인간의 소린 좁을 게 뻔한데 거기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호흡 맞추기> 중에서
저자 소개
전우익
1925년 경북 봉화에서 대지주의 손자로 태어남.
일제 시대에 서울로 유학 와 중학을 마치고 대학까지 다님.
당시 대학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해방 후 정국을 쥐고 흔드는 와중에 참자유인의 꿈을 안고 낙향.
'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사회안전법에 연루되어 6년 남짓 수형 생활을 하고, 출소 이후 한동안 주거제한을 당하는 보호관찰자 신세를 지내다가 이제까지 줄곧 고향인 봉화 구천 마을에서 홀로 농사짓고 나무 기르며 살고 있음.
아호는 무명씨라는 뜻의 '언눔'.
소일거리-부들로 자리 엮기. 죽은 나무나 썩은 나무, 집 뜯은 나무의 쓰임새를 곱게 되살려 필통, 연필꽂이, 차받침, 책상, 향꽂이 등을 만들기. 자기가 만든 모든 것을 情人들에게 노나주기.
좋아하는 것-나무, 도연명과 노신, 김용준 선생의 『근원수필』,『체 게바라』에 나오는 아르티아 등.
'리라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펙터클 문화 속의 그리스도인 (0) | 2023.12.05 |
---|---|
전능자의 그늘/엘리자베스 엘리엇 (0) | 2023.11.22 |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0) | 2023.10.17 |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0) | 2023.10.06 |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우종학 (0) | 2023.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