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고 선언한 작가, 아니 에르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0년 프랑스 릴본이라는 노르망디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통신대학 교수로 일했다. 1974년 소설 ‘빈 옷장’으로 데뷔한 이래,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작품 속에 그려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의 삶이자 바로 우리의 삶이라 할 수 있다. 2011년 자신의 작품을 모은 총서 ‘삶을 쓰다’ 서문에서 아니 에르노는 ‘삶’이라는 명사 앞에 정관사를 붙인 이유를 이야기한다. 나의 삶도 아니고, 그녀의 삶도 아니고, 어떤 이의 삶도 아닌, 개인적인 방식으로 체험하지만 삶을 채우는 내용은 누구나 똑같다는 의미에서의 삶. 개인의 경험을 보편의 경험으로 만드는 글쓰기 방식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일반적으로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인 소재를 글로 쓰는 자서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인의 삶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거나, 개인의 정체성 탐색에 집중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자서전과는 달리, 경험한 사건들을 통해 맞닥뜨린 상황과 그때의 감정들을 철저하게 거리 두며 객관적으로 그려낸다. 작가의 말처럼, 아니 에르노라는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문학을 위해 이용당한다. 실제로 불법 임신 중절 시술 장면으로 시작하는 데뷔작 ‘빈 옷장(1974)’을 시작으로,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들의 삶을 추적하며 그린 ‘아버지의 자리’(1983)와 ‘한 여자’(1987), 열정적인 사랑이 파탄으로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그린 ‘단순한 열정(1992)’, 그리고 앨범 속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 보듯 삶을 반추하는 ‘세월(2008)’에 이르기까지 아니 에르노는 끊임없이 자기의 삶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이 태어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한 자로서 느꼈던 수치심과 거리감, 더 나아가 배신감까지 쓸데없이 치장하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평평한 글쓰기’를 고수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이야기한 ‘얼어붙은 여자’(1981)와 ‘사건’(2000)에서도 자기 혐오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철저한 객관화를 유지한다. 이 같은 거리 두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모든 여성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닿게 한다.
아니 에르노는 각각의 작품 속에 글을 쓰는 이유나 방식을 기술해왔는데, 그러한 글 속에서 작가의 독창적인 문학관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써 내려간 ‘한 여자’를 작가는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며, 물론 소설도 아니다. 어쩌면 문학과 사회학과 역사,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아니 에르노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자신이 경험한 불법 임신 중절 시술을 다룬 ‘사건’에서는 그가 작가로서 세운 문학의 목표가 투철한 사명감임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과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돼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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