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린다.[4]
다방면에서 걸작들을 남겼는데, 본업인 조각에서는 다비드 상, 피에타 상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시스티나 소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을 남겼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서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삼촌들 역시 그런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6]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삼촌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후일 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는 제가 번 돈으로 군주와 같은 생활을 하실 수 있다’ 라고 쓸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미켈란젤로의 덕을 톡톡히 본다. 그의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도 본인이 가게를 차려 줄 테니 다른 짓하지 말라고 쓴 내용도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에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7]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있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미켈란젤로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 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8]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의 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리고 24세에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9] 지금도 이 작품은 모든 피에타에 관한 조각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데, 심지어 미켈란젤로 자신의 다른 피에타들도 이걸 능가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를 만들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메디치 가를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았는데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켈란젤로는 그 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 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고대 로마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팔았는데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문제가 된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 걸 알게 된[10]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의 어린 미켈란젤로를 찾아오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를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참고로 이때 밀라네제가 환불해준 큐피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명성을 얻고 난 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제 크기는 2m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미켈란젤로가 근육에 집착하여 불법 해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오류가 심한데, 이는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으면서도 조각의 중심이나 표현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실제의 비례보다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른 피에타 작품들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단의 성모'를 포함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도록 해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그 슬픔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한편, 장래의 부활을 믿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분석해본다.
이 성모상은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피에타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8월 16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transept)위에 있는 부벽(buttress)에 올려 놓을 다윗을 조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64년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려고 착수했지만 도중에 번번이 작업이 중단된 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밤낮 없이 매달려 작업에 매진한 결과 1504년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 상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였고, 또 한가지는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반응은 아니지만, 동시대의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훗날 다비드 상을 가리켜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다.
이렇듯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여질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비드 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청동상을 대체했고, 400년 가까이 광장에 우뚝 서 있던 다비드는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긴 뒤 복제품을 설치했는데 미술관 측이 다비드만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실을 건축할 정도로 대우가 남달랐다.
다만 이 작품의 문제는, 미켈란젤로가 본래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예술가였다는 점에 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군주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을 무찌른 피렌체 공화국을 찬양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특기할 점이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이 의뢰 당시에 이러한 논란에 대한 값까지 피렌체 정부에 요구하였으며, 이후 메디치 가가 피렌체로 복귀하였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고향을 밟을 수 없어 교황청의 의뢰만을 받으며 숨어 있기도 하였다. 메디치 가 복귀 이후 이 조각상의 파괴 또한 논의된 바가 있었으나,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던 가문답게 메디치 가는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대신 피렌체 공화정부를 밀어낸 메디치 가를 찬양하는 새로운 작품을 발주하였다. 바로 이 작품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로, 이 청동상에서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피렌체 공화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다비드 상을 잘 보면, 인체묘사에 진심이었던 천재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인체비례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머리와 오른손이 상당히 큰데, 이는 본래 다비드 상이 두오모 성당 중앙 돔 천정 아래 끝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얼굴의 높이가 약 50m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다비드의 머리 부분을 크게 제작했다는 것인데, 현재는 그 높이에서 보지 않으므로 머리가 살짝 크게 보이는 것. 위의 피에타 상도 비슷한 왜곡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이런 해석이 정설에 가깝다. 혹은 일부러 다비드의 의지와 강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돌을 든 오른손과 골리앗을 노려보는 얼굴을 크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또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하트 형태로 눈동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눈이 이글거리는 느낌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한편 다비드의 성기가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을 때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방문을 대비해 30cm 길이의 무화과나뭇잎 석고 조각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다비드 상을 3D 프린터로 복제한 복제품을 두바이 엑스포에서 전시 했을땐 나체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에 하체를 전부 가리고 위에서만 쳐다보게끔 전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비드상은 바닥에서 올려다보기 위하여 인체 비율을 일부러 변형한 작품이기 때문에, 두바이 엑스포처럼 위에서 보게 된다면 대두가 두드러져 마치 찐따(...) 처럼 보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왜곡하고 작품성을 망가트리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보여줬다가 '포르노'라는 일부 학부모의 항의로 교장이 물러나는 일이 벌어지자 이탈리아 측이 일침을 가했다.#
여담이지만 사진 찍기가 쉽다. 관람객들의 눈높이에서 한참 위쪽에 전시가 되어있으며, 다비드 상의 크기가 워낙 커서 멀리서 찍든 가까이서 찍든 피사체가 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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