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비빔밥/고진하
흔한 것이 귀하다.
그대들이 잡초라 깔보는 풀들을 뜯어
오늘도 풋풋한 자연의 성찬을 즐겼으니흔치 않는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숱한 맛집을 순례하듯 찾아다니지만
나는 밭두렁이나 길가에 핀흔하디흔한 풀들을 뜯어
거룩한 한 끼 식사를 해결했으니
신이 값없는 선물로 준
풀들을 뜯어 밥에 비벼 꼭꼭 씹어 먹었느니
흔치 않는 걸 귀하게 여기는 그대들이
개망초 민들레 질경이 돌나리 쇠비름
토끼풀 돌콩 왕고들빼기 우슬초 비름나물
그 흔한 맛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너무 흔해서 사람들 발에 마구 짓밟힌
초록의 혼들, 하지만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나니
그렇게 흔들리는 풋풋한 것들을 내 몸에 모시며
나 또한 싱싱한 초록으로 지구 위에 나부끼나니.
– “잡초 비빔밥” 전문
장독대의 항아리들을/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어머니가 하얀 행주를/빨고 또 빨아/반짝반짝 닦아놓은/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눈 밝은 햇님도 와/기웃대고,/어스름 밤이 되면/달님도 와/제 모습 비춰보는 걸,/뒷산 솔숲의/청솔모 다람쥐도/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하늘을 말아 쥐고/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저렇게 내려다보는 걸,/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어머니는 오늘도/닦고 또 닦으신다/지상의 어느 성소인들/저보다 깨끗할까/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주름투성이 손을/항아리에 얹고/세례를 베풀 듯,어머니는/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 “어머니의 성소” 전문
고진하(1953- )는 목사, 학자, 강연자, ‘권포근 잡초요리연구가의 남편’으로서 ‘물끄러미’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하고 즐겨 사용하는 기이하고 풋풋한 감동을 주는 작가다. 그는 1953년 강원도 영월 주천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의 집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소년시절부터 다녔다. 오르간도 있고 합창도 울려 퍼지는 작은 시골 교회가 소년을 사로잡았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그는 서울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했고, 거기서 딱딱한 신학 공부만 하다 보니 시와 소설이 그리웠다. 한신대학교에 다니던 고정희가 시인으로 데뷔하는 것을 보고 감신대학교 축제 때 다짜고짜 그녀를 파트너로 초청했다. 그렇게 시에 대한 관심을 키우며 습작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1987년『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홍천 서면 동막교회를 맡아 산골로 들어갔으며, 1992년엔 강릉 사천 제일교회에 담임목사로 갔다. 교회도 사택도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뒤로는 대관령, 앞으론 동해가 펼쳐지는 언덕에 살며 행복했다고 한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명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낡은 한옥에 ‘불편당(不便堂)’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불편’을 즐기며 모월산인(母月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비롯한 여러 장르의 글을 쓰며 한 살림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이 교회는 건물이 없고 그가 거주하는 원주 지역의 카페를 빌려 예배를 드리는 가정목회지다.
시집으로『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프란체스코의 새들』,『우주 배꼽』,『호랑나비 돛배』,『얼음 수도원』,『꽃 먹는 소』,『수탉』,『명랑의 둘레』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이 아침 한 줌 보석을 너에게 주고 싶구나』,『책은 돛』,『영혼의 정원사』,『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시 읽어주는 예수』,『쿵쿵』등이 있다. 또한 그는 제13회 영랑시문학상, 김달진 문학상, 강원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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