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칼럼

[2023년 4월 4일 화요일] 위선의 치명적 위험성/이장렬 신약학 교수

헤븐드림 2023. 4. 5. 06:09

마태복음 21:18-23 & 23:25-28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해설과 묵상

오늘 전체 본문(마21:18-23:39)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21:18-22),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21:23-22:46),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향한 책망(23:1-39), 이상 세 가지 내용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1)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예수님의 행동(마21:18-22)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적 행동’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함에 있어 종종 그 메시지를 극화(dramatize)하여 직접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적 행동에 비추어 이해할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사건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성전의 영적 상태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평가와 경고를 상징합니다. 성전의 제사가 화려하고 제의적으로 엄숙하며 그 가운데 종교지도자들의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 있을지언정, 주님의 관점에서 성전(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성전제도는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부패하여 변질되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렘24:1-10 참조).

 

(2)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이어지는 마태복음 21:23-22:46은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간의 논쟁 그리고 그 가운데 주님이 제시하신 비유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전 지도자 간의 논쟁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지속적인 도전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급이 다르고 권위 있는 응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성전에 오셨는데, 막상 성전의 지도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고 배척하며 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이를 통해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종교적으로는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지에 상관없이)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스스로 폭로합니다. 물론 성전의 지도자들은 결코 예수님의 논쟁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마치 사전에 번호표를 받은 듯 돌아가며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덫을 놓지만, 그들의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의 공개 논쟁을 포기합니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예수]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6).

 

(3) 위선에 대한 경고와 책망
이어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강한 책망의 말씀을 주십니다(마23:1-36). 예수님이 이들을 매섭게 질책하시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위선(hypocrisy)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라고 하셨습니다(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말 자체가 아예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겉으로는 엄숙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 된 듯 행동하고 그럴 싸하게 말하지만, 속은 변질되어 세상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경건’의 언어를 입에 달고 살지만, 실은 맘몬주의(배금주의)의 노예였습니다(16-22절). 신앙의 참 본질이신 하나님에 대해선 가볍게 생각하면서 종교적 형식에만 집착했습니다(25-28절). 종교적 형식에는 그토록 집착적이었으나, 막상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23절). 그들의 겉모양은 사회-경제-종교적으로 꽤 근사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영적으로는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습니다(25-26절).

어떤 분들은 ‘겉과 속이 다 일치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라고 반문하실런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주님 외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같은 반문이 혹시라도 우리의 종교적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라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23장 묵상을 통해 예수님이 외식을 얼마만큼 선명하게 반대하셨고 또 얼마만큼 위선을 싫어하셨는지 배워야 합니다. 종교적 위선으로 가득 찼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사도들과 최초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34절).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맙니다(37-39절 참조).

근사한 종교적 형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줄 것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합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포장된 모습이나 종교적 가면놀이가 주님께는 조금도, 그러니까 아주 조금도 통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속일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절친에, 가족까지,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을 속일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갈6:7 참조). 주님은 모든 것을 단번에 보십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겉모양에 현혹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즉시 관통하여 보십니다.

 

종교적 형식으로 우리 삶의 본질이요 이유요 목적이신 하나님을 대체하고자 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의 종교적 위선과 경건을 빙자한 외식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합시다. 더 늦기 전에 주님께로 돌이킵시다. 오늘 예수님의 첫 선포를 기억합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리고 시편 기자의 고백을 함께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한 줄 기도: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의 종교적 위선과 외식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에 심폐소생의 역사를 베풀어 주소서.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