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역사 간증

성결교의 역사

헤븐드림 2022. 11. 29. 05:47

한국성결교회는 장로교, 감리교와 달리 외국선교사가 직접 들어와 세우지 않고 한국인 전도자 정빈과 김상준의 자생적 개척(自生的 開拓)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07년 자생적 개척으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성결교회의 모체(母體)는 엄연히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이다. 초기 한국성결교회는 교리와 신조 등 동양선교회와 불가분의 직접적 연관이 있다. 동양선교회는 명칭 그대로 동양(아시아)에 사중복음(四重福音)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까다 쥬지와 함께 카우만이 일본 동경에 세운 선교단체이다.
 
1. 출생과 성장  
찰스 카우만 (Charles E. Cowman)은 미국 일리노이(Illinois)주 툴론(Toulon)에서 1868년 3월 13일 부친 데이비드 카우만과 모친 메리 카우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 개척자의 후손인 카우만 부친은 1870년 아이오와로 농장을 구입하여 이사하면서 정착하였다. 감리교회를 출석했던 카우만 부모는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카우만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15세 어린 나이에 카우만은 부모 집을 떠나 전신 기사가 되어 철도국에 취직하게 되었다. 2년 후 그는 미국 최대 철도국으로 발전한 벌링톤 철도국(Burlington Railway)에서 기차 발송계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는 시카고로 승진하여 전근을 가게 되었다. 시카고 전신국에서 일할 때 동종 업종에서 수년간 일한 직원들이 받는 월급을 받기까지 인정을 받았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교회를 가는 것을 소홀히 여겼고 유혹이 가득 찬 도시의 거리를 방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신앙의 훈련과 부모의 모범적인 삶과 기도는 그를 지켜 주었다. 이후 로키 산맥 중심의 멋진 온천지인 콜로라도 글렌우드 스프링즈에 있는 서부연합전신국(The Western Union Telegraph) 사무실 첵임자로 일하다가 1889년 6월 8일에 감리교도인 레티 버드만(Lettie Burd)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로키 산맥 중심부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천국같은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로키산맥 고지대에 적응하지 못한 아내 레티가 중병에 걸렸다. 아내의 병세가 중하여 위독하게 되자 뜻밖의 위기상황에 직면한 카우만은 어릴 적 신앙을 다시 찾게 되었다. 카우만은 간곡히 주님께 기도하고 매달렸다. “주님! 나의 아내의 생명을 구해 주세요. 어렸을 때 기도했던 이 소년의 기도를 들어 주세요.” 간절히 기도한 후 극적으로 아내의 병이 회복되자 그는 의사의 권유로 도시생활을 선택하여 시카고로 이사하였다. 그 곳에서도 전신국의 책임을 맡게 되어 수하에 많은 직원들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었다.
 
 2. 소명과 헌신
시카고로 전임한 카우만은 경제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여유 있는 생활을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레티 카우만이 우연히 시카고에 소재한 은혜감리교회 예배당을 지나가다가 복음성가 가수의 찬양을 듣고 부흥회에 참석하였다가 은혜를 받고 회심(回心)을 하였다. 
 
카우만도 아내의 권면을 받고 함께 참석하게 되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회심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이 날 이후로 카우만 부부의 삶은 이전과 180도로 달라져서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1894년 9월 3일 두 부부는 시카고 무디교회에서 개최한 선교집회에 참석하였다. 대회 주강사였던 심프슨(A.B. Simpson) 박사를 통해 아내와 어린 자녀가 있는 한 회사원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고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아프리카 오지로 떠났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침을 느꼈다. 이내 성령의 강권적인 선교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선교사의 부르심의 시간에 그는 한 달 치 봉급과 차고 있던 금시계를 헌금접시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부부가 함께 일어섰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지 가겠다고 선교의 부름에 응답한 카우만 부부는 이후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다.  
 
카우만은 전신국에서 신우회를 결성하여 시카고 전역에서 전도하며 보다 전문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에반스톤에 위치한 개렛신학교(Garrett Tteological School of Evanston) 특별과정을 마치고, 무디상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을 6년간 수학하며 졸업하였다. 
 
어느 주일 아침, 은혜감리교회에서 동양의 무디를 꿈꾸며 무디성서학원에 수학하고 있는 일본인 나까다 쥬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앞으로 그의 사역의 중심지가 될 일본 동경을 알게 되었다. 그는 레티 카우만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며 준비하던 중에 마침내 1900년 8월 11일 일본으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성경책 여백에는 “1900년 8월 11일 오전 10시 30분, 일본으로의 부르심를 받다”가 기록되어 있다.  
 
카우만은 부인과 함께 1901년 2월 피아노를 판 여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미 귀국한 나까다 쥬지(中田重治)를 만나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를 함께 설립하였다. 이후 카우만은 동양 각지에 사중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자 육성을 위한 동경성서학원을 세우고 사역하다가 1924년 9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닫는 말   
동양선교회 설립자 찰스 카우만은 마가복음 16장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자신의 남은 삶을 복음전파를 위해 바쳤다. 카우만과 그의 아내의 순교적 열정과 믿음의 선교항해를 통해 한국성결교회는 두 부부에게 사랑의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참으로 동양선교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한 카우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20세기 초 위대한 복음의 전사(Missionary Warrior) 였다. 
 
정상운 목사 [본지 논설위원.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