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소식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신학 2

헤븐드림 2021. 6. 17. 04:02

신학수업

1923년 17세 때 본회퍼는 아버지와 형들의 모교인 튀빙겐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하여 두 학기를 공부했다. 당시 그는 튀빙겐에서 신약학자인 아돌프 슐라터(Adolf Schlatter), 교회사가인 칼 뮬러(Karl Müller)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본회퍼는 학문적인 출발을 하고 이듬해 형 클라우스와 로마와 북아프리카로 여행을 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가톨릭 문화의 본류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성 베드로성당을 보고 반발이나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것에 경탄했다고 한다. 1944년 테겔(Tegel)에서 “그것은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땅의 한 조각이었다”고 회상했고, 1928년 바르셀로나에서는 그것을 어린아이가 오랜 세월 후에 고향을 찾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 교회란 우리가 그 의미를 잊지 않으며 그 밝음과 크기를 오늘 날 다시보기를 원하는 그것이다”고 했다.

본회퍼의 신학순례는 단지 강의실에서 만이 아니라 지상의 참된 교회를 향한 그의 영적 구도의 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목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신학 수업을 시작하고 로마여행에서 만난 가톨릭교회에 대한 감동적인 기억은 그로 하여금 인간 삶의 표현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인간의 삶을 압도하고 이끌어 가는 교회의 권능과 영광을 보게 했다. 결국 그는 냉랭한 기독교 전통 가정에서 나서 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이성적인 아버지의 집(우르)에서 탈출하여 살아 숨 쉬는 신(神)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광야여행

베를린 1924년~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요새이던 베를린 훔볼트(Humbolt) 대학교에서 에른스트 트뢸치, 아돌프 폰 하르낙의 후광과 교회사의 저명한 루터연구가 칼 홀(Karl Holl), 성서신학의 다이스만 (A. Deismann), 구약학의 죌린(Ernst Soellin), 교의학자인 그의 박사지도교수 제베르그 (E. Seeberg)에게 수업을 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미 1925년에 칼 바르트(Karl Barth)의 글을 읽고, 1931년 7월 바르트를 만나 변증법적 신학과 조우하고 바르트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본(Bonn)과 괴팅겐(Göttingen)의 교수였던 바르트의 『로마서주석』,『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그리고 ≪시대의 중간≫ (Zwischen der Zeiten) 잡지 등을 읽었을 것이다.

바르트에 대한 본회퍼의 초기의 매료는 그가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을 읽고 그의 친척이자 감독인 한스 폰 하제(Hans von Hase)에게 보냈다는 편지에서 드러난다. 바르트가 그의 책에 대한 반향에 대해 놀라움을 “어두움 속에서 탑 위에서 하나의 밧줄을 붙잡아 당기니 우렁찬 종소리가 놀라게 했다”는 것에 공감한다고 했다. 본회퍼는 바르트의 영향으로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 그것이 인간의 높아짐을 향한 욕망의 결과, 바꾸어 말하면 열등감의 결과인 것을 깨닫고 신학자로서 갖고 있던 허세(Ehrgeiz)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에게 이웃(동료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빼앗아 가게 했다. “그 때 나는 경악스러울 만큼 홀로였고 나 자신에게 만 몰두하였다.”(GSⅢ, 25) 그는 바르트의 외침에 귀가 열렸다.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모든 신학과 신학자들의 항복을 분명히 뜻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길의 종국이 하나님이 스스로 말하심을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 176f.)

다섯 번째 학기에 본회퍼는 바르트의 도움으로 비로소 신학함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땅의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하늘 아버지의 광명함으로 인도를 받게 된 것이다.

땅/ 어두움 하늘/ 밝음
권위/ 전통, 의무 자애/ 친교, 자유
자기애/ 에로스 자기희생/ 아가페
위를 지향 아래로 향함


박사학위

 

본회퍼는 1927년 제베르그에게서 쓴 그의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를 제출하고 21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그가 신학에 입문한 후 6학기부터 쓰기 시작하여 18개월 만에 탈고한 것으로 제목은 당대의 신학적 거장인 알트하우스(Althaus)의 것을 거꾸로 했다.

본회퍼의 연구의 기저에는 그가 발견한 신학의 기능 즉 ‘현실의 학으로서의 신학’에 있었다. 그는 모든 신앙의 진리(계시)는 경험의 카테고리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존재론을 사회적 카테고리로서 해석했다.

부제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개신교 신학사상, 독창적으로 사회철학/사회학을 교의학적 연구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계시의 사회성’(Sozialität der Offenbarung)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본회퍼는 서론에서 “인격, 원상태, 죄와 계시와 같은 개념들은 오로지 ‘사회성’의 맥락에서 파악된다”고 했다. 이것은 후기에 그의 비종교적 해석학의 단초를 지시하며 현대 해방신학의 ‘복음의 정치적 해석학’(L. Boff, D. Sölle)을 암시한다. 1928년 스페인. 박사학위 후 본회퍼는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1년 간 준목견습(Vikar)을 한다.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

1930년(24살 때) 그는 교수자격 논문으로 『행위와 존재(Act und Sein)』를 제출했다. 이것은 그가 바르셀로나에서의 준목으로서 교회봉사를 마치고 돌아와 1929년 여름과 겨울에 걸쳐서 집중하여 쓰고 1930년 2월 논문을 마치고 1930년 7월 18일 통과하였고, 1930년 7월 31일 훔볼트 대학교에서 “오늘의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교수 취임강연을 했다.

논문의 주 관심은 경험적인 교회의 발견인데, 이것은 계시의 사회적 카테고리(Kategoria)에서의 인식(해석)이다. 본회퍼는 초월과 내재라는 양 극단적인 신학적 테오리, 즉 전통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Kontingenz, K. Barth)와 세계 속에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현실(Kontinuität)을 연결시키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