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림자/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 '흰 그림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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