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당 신,눈을 쓸면서,사랑의 침묵 / 도종환

헤븐드림 2012. 1. 5. 08:05

 

 
        당 신 / 도종환 가난한 이의 추녀와 풍요로운 이의 뜨락에 똑같은 햇볕을 비추어주시는 당신 사나운 짐승과 착한 꽃에게 똑같은 빗줄기를 내려주시는 당신 간교한 자의 수레에도 말없이 바퀴를 달아주시고 포악한 자의 손에도 칼을 쥐어주시는 당신 산짐승 소리를 미워하는 젊은 꽃잎들이 매맞아 떨어지는 걸 바라보고만 계시는 당신 저 절겅거리는 사슬소리를 가만히 듣고 계시는 당신 기다리는 그날은 꼭 오느냐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시는 당신 이렇게 쉬이 오지 않는 것이냐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시는 당신.
        눈을 쓸면서 / 도종환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내 아직 어려서 눈물이 많고 오직 한 가지만을 애터지게 사랑하여 내 일상의 뜨락에 가득가득 눈들이 쌓일 때 당신은 젖은 빗자루로 내 앞의 길을 터주고 헐거운 내 열정의 빗장마다 세차게 못 박아주던 망치소리였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철철 고여 넘치는 우물이기 전에 그 우물에서 퍼올린 두레박 가득한 하늘빛이기 전에 썩고 버려진 것들과 함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섞이어 흘러가자 아린 소금물 첨벙첨벙 허릴 적시며 외진 갯가로 배 밀어 가시던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눈 내리는 당신의 하늘만 다 못 거둔 아픔이지 않고 눈발처럼 소리도 못하고 땅 속에 스러지는 이 땅에도 아픔은 너무 깊지 않습니까 내 다시 이렇게 눈을 쓸며 당신 앞으로 갈 때 슬픔은 오직 슬픔의 것이라 하시며 손가락 끝으로 쑥새 몇 마리만 가리키시렵니까 당신의 갯가 위로 부는 바람은 이 땅에도 붑니다 당신 앞에 덧없이 지는 이국의 꽃 말고 땅에 떨어져 모진 바람 밑에 썩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거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비겁한 무리를 미워하는 우리들 사랑에 희망의 누룩으로 당신은 썩을 수 있고 외롭지 않은 것들과 싸우는 우리 마음속 횃불 타는 기름으로 당신도 고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뼈아프게 찾는 양식을 나 또한 일생을 바쳐 찾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허기처럼 내리는 이 눈발로 하늘의 양식을 빚어내고 계시렵니까 녹는 것들이 모여 물줄기 이루어 가듯 이 땅에서 서로 뜨겁게 녹으며 사랑하면 짧은 이 삶이 고이어 영원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사랑의 침묵 / 도종환 꽃들에게 내 아픔 숨기고 싶네 내 슬픔 알게 되면 꽃들도 울 테니까*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은 찾아와 강물이 내게 부드럽게 말 걸어올 때도 내 슬픔 강물에게 말하지 않겠네 강물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로 온 들을 적시며 갈테니까 겨울이 끝나고 북서풍 물러갈 무렵엔 우리 사랑 끝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바람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새 떼들 돌아오고 들꽃 잠에서 깨어나도 아직은 아직은 말하지 않겠네 떠나는 사랑 붙잡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꽃들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아름다운 꽃잎 일찍 떨구고 말 테니까
이미지:동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