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꼽히며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이어령 교수는

1934년에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본인의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1966)하였으며,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고,

'문학사상' 주간과 현대평론가 협회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서울, 한국, 경향, 중앙,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이어령 교수는 평생을 글 쓰는 삶을 살았다.

교수는 본인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생명이나 안일에 대한 결핍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존재적 의로움, 내가 혼자라는 것에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많은 글을 썼지만 인간 존재적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틈새를 채울 수 가 없었다.

지성의 한계였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가 존재적 외로움에 대한 해답을

사랑하는 딸을 통햇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어령 교수의 딸 민아씨는 미국에서 변호사와 검사로 일한 실력가이다.

민아씨는 본인의 질병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늘 아버지를 알고

믿게 되었으며, 지금 치유사역, 청소년 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무신론 이어령 교수가

딸의 갑상선암과 망막파열로 실명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딸의 문병 갔던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서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천한 능력밖에 없사오니 그것이라도 좋으시다면

   당신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쓰실 수 있도록 바치겠나이다."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기적이 일어났다.

딸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는데

의사는 처음부터 망막손상이 된 적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자신의 지식과 돈으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 앞에 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은 딸의 병을 치료해 주셨다.

이어령 교수는 75세 되던 해인 2007년 7월에 세례를 받았다.

딸로 인해 완고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니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

 

이어령 교수는 예수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존재적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고,

부활 영생을 소유한 최고의 행복자가 되었다.

이어령 교수는 부활과 영생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와 한 몸이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는 최고의 행복자가 된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하나님이 그의 70인생, 글쟁이로써 방황을 허락하신 의도는

평생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때달을 것을 얘기하면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너는 좀 늦게 써먹자 하는 뜻인 것 같다고 하였다.

  "바울은 베드로나 제자들에 비해서 지성과 이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과 베드로를 모두 쓰셨습니다.

   믿는 일이야 고기잡는 어부들이 낫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바울같은 사람이 더 잘합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바울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저는 이제 바울 같은 전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령 교수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겨우 포도밭에 왔는데

나에게도 똑같이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

제가 늦게 왔지만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그동안 못한 일을 열심히 하면

틀림없이 그 포도원지기처럼 저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실 것이라며,

자신의 남은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