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회개

램프를 켜다/홍수희

헤븐드림 2011. 9. 24. 05:12


 

 

 

    램프 켜다 / 홍수희

    먼저 어둠이 필요했네
    나무가 한 잎 두 잎 제 몸에
    노오란 램프를 켜기까지는

    제 슬픔의 뿌리 깊은 데까지
    제 한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순결한 기름을 채유하기까지는

    너를 밝혀주기 위하여는
    먼저 나의 어둠을 밝혀야 하리

    나무는 폭풍의 터널과 회한의 파도와
    장마의 소용돌이에서도 결코
    다문 입술을 풀지 않았네

    눈물을 흘리는 자 있거든
    함부로 위로의 소리를 하지 마라
    차라리 잠자코 듣고 있어라
    어깨를 나란히 곁에만 있어주어라

    동질의 고통과 동질의 절망과
    동질의 슬픔이 없이는
    애당초 누구를 이해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가을나무는 다만 은은한 몸짓으로
    나뭇가지 가지마다 노을빛 램프를
    하나 둘 매달기 시작했네
    , 가을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