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독칼럼

브아타! 뜻밖의 은혜(시편 32편 1-11) 인천 더함교회 이진오 목사

헤븐드림 2024. 1. 21. 02:59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5권의 율법서를 주었고, 다윗은 5권의 찬양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5권의 율법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하고, 5권의 찬양은 시편 5권을 의미합니다.

 

유대교가 가장 중시하는 ‘토라’(율법서)와 ‘시편’을 동일한 권위로 말하는 것도 특이하고, 시편은 1권인데 왜 5권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도 의아한 분이 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편을 ‘토라’만큼이나 중요시하고, 신약성경에서도 이사야(419번) 다음으로 시편(414번)을 가장 많이 인용할 정도로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토록 시편을 중시한 이유는 시편 내용이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과 구약의 역사, 공동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5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권은 1편~42편, 2권은 42편~72편, 3권은 73편~89편, 4권은 90편~106편, 5권은 107편~150편입니다. 시편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토라(말씀)시, 제왕시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권별, 각 편별로 그 내용이나 저자 등을 고려해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시편은 앞부분이 탄식의 간구에서 점점 적들과의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간구로 진행되다가, 감사 찬양으로 전개 되어 갑니다.

 

특별히 시편150편의 마지막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치는 것은 전능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확신과 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시편32편을 통해 죽음의 권세인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1절위에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표제’라고 합니다. 표제는 해당 시의 지은이나 장르, 시의 역사적, 상황적 배경 등을 설명해 둔 것입니다. 오늘 32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스길”은 “교훈”,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시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8절에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이 시가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장르는 죄를 회개하는 “참회시”나 죄 용서에 감사하는 “감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감사시”들이 대적자, 질병, 환란 등에서 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시32편의 감사 내용은 죄로부터 구원해 주심입니다.

 

값싼 은혜, 값비싼 대가

 

1절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복되도다”는 히브리어로 ‘아쉬레’입니다. 이 시의 원래 히브리어 순서는 ‘아쉬레’로 시작됩니다. 즉, “복되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라는 것입니다. 복되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시편1편에서 “복되도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와 마5:3의 팔복에서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이 저의 것이다”와 동일합니다.

 

“사함을 받는다”는 “치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허물이 치워졌다는 것입니다. 또 “가리움”은 “덮는다”는 의미로 죄가 덮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허물을 치워주시고, 그 죄를 덮어주신 자는 복된 자라는 고백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6~8)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십자가로 인해 값없이 주시는 구원, 죄인된 자들에게 대해 의롭다 칭해주시는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는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엄청난 값을 치루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를 망각합니다. 우리가 받은 죄 사함과 구원은 엄청난 값을 치른 대가입니다. 값없이 받았으나 그것을 지키고 감사함은 엄청나게 귀한 값으로 치른 대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말합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에 대해 표준새번역 성경은 “주께서 그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치움을 받고 죄가 덮음을 받은 자, 그래서 주께서 그 잘못을 따지지 않은 자는 그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삶

 

이때 “마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로 창조 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생기”, “생령”을 의미합니다. 이는 숨, 몸, 힘, 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마음과 생각, 행동 등 모든 것에 거짓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삶! 이것이 값없이 받은 십자가의 은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값있게 지키며 사는 신자의 삶이며 그런 삶이 복되고 복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삶에 대해 3,4절이 설명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 침묵할 때 종일 신음하고 뼈가 쇠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신음”은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쇠하다”는 뼈가 삭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그 죄가 죄책감의 괴로움이 사자가 으르렁거림같이 속에서 신음하고, 뼈가 삭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4절) 죄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에 대한 고통은 주님의 손이 밤낮으로 억누르는 것 같으며, 온 몸의 진액이 뒤엎어져서 여름의 가뭄과 같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죄의 무서움과 파괴력에 대한 고백입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이 시를 고백하는 자는 이미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죄 사함의 은혜를 몰라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지은 죄에 대해 이렇게 죄 사함을 선포하고 감사하며 돌아서지만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죄 용서가 너무 값싸게 선포되고 너무 값싸게 확신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지간한 죄를 짓지 않고는 죄책감도 가지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정답을 알기 때문에 너무 값싸게 죄 용서를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참회시를 좋아합니다. 참회시를 통해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데 눈속임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 죄책감으로 인한 뼈저린 반성과 후회, 탄식을 겪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고통과 대가가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예민함이 필요합니다. 작은 죄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죄악으로 인해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영적인 떨림이 필요합니다.

 

시편38편은 죄를 지은 자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이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이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런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종일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리고, 뼈가 삭는 것과 같은 후회가 있고, 하나님의 손이 누르는 것 같은 두려움과 진액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낄 정도로 죄에 민감하고, 죄를 후회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브아타’, 뜻밖에 용서

 

5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가볍게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확신하지만, 시인은 죄의 깊이와 무게로 인해 그 부끄러움과 황망함으로 인해 견디다 견디다 못해 별수 없이 고백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곧”은 히브리어로 ‘브아타’인데 이는 “그런데 당신은”이란 의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별수 없이 죄에 대한 큰 두려움과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고 고백하는데 “그런데 당신은” 이는 “뜻밖에”라는 의미입니다. 뜻밖에 당신은 내 죄악을 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의 무게로 인해 용서함도 기대하지 않고 고백했는데 너무나 뜻밖에 주께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죄의 은총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야 기쁨이고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교회의 죄악은 가리거나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 부끄러움, 그 고통을 그대로 않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반전의 은총, 뜻밖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가려두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 치워주시고 덮어주십니다. 아무리 어두운 것도 빛 가운데로 나아오면 더 이상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셀라”는 악상기호로 단락을 끝낼 때 사용됩니다. 4절에 셀라가 있고 5절로 넘어가는 것은 시인의 절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의 반전을 잘 나타내줍니다. 5절의 예상치 못한 은혜에 대한 반전의 셀라인 것입니다. 참고로 시를 읽을 때나 노래할 때 “셀라”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셀라 이후에 한음을 올리거나 소리를 높여 읽거나 부르면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 이다”(6절) “경건한 자”는 ‘하시딤’입니다. 이 말에서 ‘헤세드’ 즉, “은혜, 자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붙잡고 힘과 능력을 원천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하시딤’입니다.

‘하시딤’은 죄를 드러내고 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안전한 은혜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 이다”(7절) 죄(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숨으면 구원해 주십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따름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절) 이렇게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숨는 자를 하나님은 교훈하고 가르치시며, 걸어갈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저 죄용서 받았다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바른 것,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너도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시는 예수님 말씀처럼 다시는 죄 가운데 거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 그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절) 무지만 말이나 노새와 같이 재갈과 굴레 씌어 억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갈 때 그저 로봇처럼 수동적으로 억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끌고 가면 따라가겠다 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이해하고 그 뜻을 분명히 따라가려고 해야 합니다. 시편1편에서 고백하듯이 복된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복된 자이고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이해하고 따라가는 자입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10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절)

 

이는 명령입니다.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즐거이 외치라.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슬픔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죄의 고통 가운데 주저 앉아있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구원이시라 즐거이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편32편을 통해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은 자의 고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참회와 그의 감사를 들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우리의 죄를 치워주시고 덮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의 무서움과 죄의 무거움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치우시고 덮으시는 대가로 지불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반복해서 지으며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는 대가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그가 찔리고 그가 조롱을 받고 그가 고통을 당하고 그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쉽게 죄를 짓고 죄 용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대가를 생각하며 그 은혜 속에 우리는 정직한 자로, 경건한 자로, 거룩한 자로 날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기를 구하고 힘써야겠습니다.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반복하기보다, 그 은혜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이 한 주간 살면서 고백하지 않은 죄악이 있다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함으로 용서함을 받고, 죄 용서함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며 사는 날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더험공동체 교회 이진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