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혼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헤븐드림 2021. 12. 17. 05:47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2019, 150~151쪽

'삶과 영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기 예수 나심/박두진  (0) 2021.12.25
믿음의 얼굴을 본다/박노해  (0) 2021.12.23
결이라는 말/문성해  (0) 2021.12.12
초겨울 저녁/문정희  (0) 2021.12.09
선한 천사/라파엘 알베르티  (0) 2021.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