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2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창 15:4-6) 그의 아내 사래도 믿었겠지만, 사래는 결혼한 후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했고(창 11:30)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좀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한 생각이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애굽 사람 여종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를 자기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일을 남편에게 권유했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첫 사람 아담이 그 아내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인 것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라 하더라도 그는 거절할 것은 거절했어야 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이 있다.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 후이었더라.
‘첩’이라는 원어(잇솨)는 ‘아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아내가 둘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의 갈빗대로 한 여자를 만드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동성간의 결혼이나 일부다처(一夫多妻)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4-5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으로 인하여 임신한 하갈은 자신의 임신함을 깨닫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잘못이었다. 하갈은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것이 여주인 사래의 덕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주인을 끝까지 존중하고 섬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었고 마음이 높아졌던 것이다. 사래도 그런 일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아브람과 자신의 가정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일이 도리어 자기에게 고통으로 돌아와 당황했을 것이다.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종 하갈에게 행하라고 말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으니 학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주인이 여종에게 멸시를 받고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좀더 참고 끝까지 잘 대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자기 남편의 아기를 임신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었다. 하갈의 인격이 부족해서 여주인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났으나 그가 그런다고 여주인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내 사래에게 있었다.
학대를 받던 하갈은 사래의 얼굴을 피해 집을 나와 도망쳤다. 학대받는 자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대는 자신이 스스로 가져온 결과이었다. 그가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런 학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 도망칠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겸손히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을 일이었지만, 그는 도망쳤다.
[7-8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Shur)[슈르]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을 만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한 천사가 아니었다. 10절에 보면, 그는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이라는 말씀을 보면, 그는 구약시대에 종종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창 22:12, 14; 출 3:4).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광야의 샘 곁 곧 슈르 길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다. ‘슈르 길’ 곧 슈르로 가는 길은 당시의 주요한 도로 중의 하나이었고 그 길에 한 샘이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하갈을 만나신 것은 그 샘 곁, 즉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며 하갈의 신분을 언급하셨다. 그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갈로 하여금 즉시 자신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멸시했고 그에게 학대받았던 사래를 ‘나의 여주인’이라 불렀다. 그렇다, 그는 사래의 여종이었다.
[9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여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종은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중히 여기신다. 또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것은 자신과 태아 모두에게 해로웠다. 그 태아는 아브람의 아이이다. 그는 자신과 그 아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힘들어도 집에 머물러 있으며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질서를 존중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하고 직원은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적절한 다른 길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현재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겸손히 자기를 부정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또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녀의 다산(多産)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복이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실수로 잉태케 한 하갈의 아들도 복주셔서 번식케 하실 것이었다.
또 그는 하갈이 낳을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신 것이다. 그는 사람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또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다(시 68:5).
또 그는 하갈이 낳을 아들이 사람들 중에 들나귀같이 되겠고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어떻게 활달하고 호전적 인물이 될지를 보인다.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은 호전적 유목민의 특징을 가졌다.
[13-16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하갈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외로웠겠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에 너무 감격하였을 것이다. ‘브엘라해로이’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샘물’이라는 뜻이다. 그 샘물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는 언급은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라고 보인다. 성경의 사건들은 사람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 아니고 진실한 역사적 내용이다.
때가 되어 하갈은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 그때 아브람은 86세, 즉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1년쯤 되는 때이었다. 비록 아브람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첫 아들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사래와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였다. 여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잘못이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때로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믿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지키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은 자기 위치를 망각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것도, 인격적 결함을 가진 여종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부족과 연약함이었다. 우리는 질서를 중히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피차 복종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종은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엡 6:5). 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사람의 감정을 따라 보복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8).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롬 12:17, 21).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자를 감찰하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만 돌아보시지 않고 그의 여종 하갈도 돌아보셨다. 그는 하갈을 감찰하셨고 그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도 번창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시며 고통 중의 우리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7:10-16,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어떤 사람의 고난이 비록 그의 부족 때문에 왔을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며 그를 그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묵상
목마른 삶의 길은 때로 원망이며 후회이기도 하다. 하갈의 경우가 그렇다. 임신한 그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참 뜻밖이다. 사라의 여종 하갈임을 강조하시고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를 질문하시는 하나님은 참 기가막히게 멋지신 분이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신 신약의 경우와 같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아시며 과거를 회상시키시며 반추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장면이다.
나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한 모든 일을 후회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가장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 탓으로 많은 실수를 하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었던 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 과거는 다 지나갔고 그로 인한 현재의 상황에서라도 늘 회개하는 심정으로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나의 삶을 심사숙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영적인 지혜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라도 아니고 하갈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물으시는 길을 열심히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나의 고백을 드린다.
"주님께로 왔으니 주님께로 가나이다. 하나님이 나의 폐부와 장기를 지으셨고 영혼을 지으셨으니 하나님의 뜻에 거하며
하나님이 지명하시는 곳으로 가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