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13권 혹은 14권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밝히 증거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과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였다.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역했던(롬 15:20)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올라가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와 연대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집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인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썼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는 구원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또 9-11장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 얻은 자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구원 얻은 자들은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복음 안에서 문안함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이나 쾌락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즐거이, 온전히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두 번 불리었다(행 14:4, 14 원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교훈과 노선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실로’[안식의 사람]나 이사야 9:6의 신적 아기의 탄생이나 미가 5:2의 그의 근본이 태초인 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도 그러하셨다. 즉 그는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프뉴마 하기오쉬네스)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人性)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호리조)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시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 죽음의 그늘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그 안에 구원과 영생, 기쁨과 소망이 있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부르심을 입고 그들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작은 글씨로 첨가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의 전달자는 사도들이며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자이시다. 그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그의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통해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그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존귀한 구원의 복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을 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과 거룩하여짐과 온전해짐, 즉 우리가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평안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이 필요하다.
8-17절,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 얻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또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며 몸은 영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단지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주장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11-12절] [이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원함이니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 보기를 심히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그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말씀 사역이었다. 그 말씀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성경의 바른 강해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서로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하여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의 성도들의 인격의 온전해짐과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격이 온전해짐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들의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전통사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능력’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다른 수단으로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전 1:21-2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긴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과 성경을 통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신앙은 죄인이 구원 얻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다(11절). 우리의 믿음과 인격은 성경말씀으로 견고해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며(롬 10:17) 말씀은 영의 양식과 같고(마 4:4)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욥 23:12). 그것은 우리의 신앙 지식을 확실케 하며(눅 1:4)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딤후 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로의 믿음을 인해 위로 얻기를 원했다(12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된다(고후 1:3-4). 성령께서는 위로자로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참된 믿음 때문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 죄인들은 그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많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본문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많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많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항한다.
사람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모든 죄는 불의이며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경건이다.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나 어긴 것이 죄이다. 죄들 중 불경건은 근원적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므로 여러 가지 죄를 짓는다.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그것이 사람의 종교성, 하나님 의식, 양심, 이성 등이다.
[20절]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됨이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작은 건물 하나도 지은 자가 있는데, 천지만물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천지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성(神性)을 알게 해준다. 자연만물은 사람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두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며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시며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은 인류의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성의 회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말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말을 헛된 우상의 말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사람이 신인가? 돈이 얼마나 헛되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재벌의 자살이나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돈을 위해 살며 자신만 사랑하며 의지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사람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 받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에게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파데 아티미아스)[저열한 욕망]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아스케모쉬넨)[상스러운 행위들]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저열한 욕망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성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들의 간음, 음행, 매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성이 남성으로 더불어 상스러운 행위들을 하였다. 이것은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성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심지어 지식인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했다(투스쿨란 토론집 4:33; 반즈 노트, p. 554).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성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AIDS) 질병의 세계적 유행은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은 경건과 도덕성의 완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아야 한다. 돈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과학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를 버리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이 음란한 세대에서 특히 음란, 간음, 매춘, 동성애의 악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깨끗이 씻음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악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피그노세이)[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아도키몬 눈)[부패된 생각](NASB, NIV)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부패된 생각에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부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거절하는 자는 결국 여러 가지 죄악들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3) 추악(포네리아)[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詐欺)[속임],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불경건의 결과,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 불의’는 뒤에 열거된 여러 죄악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不義)는 그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불의를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음행이 가득하다. 사람의 죄악들 중에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드러진 죄악은 음행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마 12:39).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주셨고 사람에게 성적 순결과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명하시며 음행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라고 명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 또 탐욕은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욕은 사람으로 다른 죄들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며 거기서 각양의 죄들이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요일 3:15).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인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분쟁한다. 시기와 미움, 사랑 없음, 자기 중심적임, 상대방을 무시함, 오해함 등이 분쟁을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속임과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하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남의 명예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모든 허물을 덮지만(잠 10:12),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데오스튀게이스)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만(BDAG) 인간 관계의 죄를 말하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Thayer). 모든 악이 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지만 특히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악이다.
또 사람들은 ‘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거만함과 교만함과 자랑함, 이 세 단어들은 뜻이 서로 가깝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고(딤전 3:6)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과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하는 악행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벌이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자녀들은 부모를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교훈과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교훈과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한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매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되고 고쳐질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아쉬네투스)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요](전통본문)4)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된 지혜와 지식, 총명과 이해력이 없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이나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많은 경우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학대하고 그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또 보복하려 한다. 사람은 서로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달래기 어려운 존재이다. 이런 부족 때문에 때때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하게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쉰유도쿠시)[칭찬하느니라,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몸의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받을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들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어 버려두셨다(24, 26, 28절). 사람들은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고 약속을 어기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게다가 악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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