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클래식

야상곡 '이별'/ 글링카

헤븐드림 2010. 3. 4. 06:56


La Séparation for Piano in F Minor 

글링카 / 야상곡 F 단조 '이별'


Alexei Lubimov, Piano


Alexander Sokolov, Piano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

 

국제적으로 처음 인정을 받은 러시아의 작곡가로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창시자.

그는 1804년 6월 1일,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에서 출생했다.

지주인 귀족집안에 태어나, 음악적인 환경의 혜택을 입고 자랐으며, 10~11세 때 삼촌의 개인 악단 연주를 듣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18~2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가 존 필드와 찰스 마이어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3년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1824~28년 체신부에서 일하였으나 관리로서는 너무 게을렀고 야심이 없었으며 취미로 노래와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3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개시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 결혼하였고, 푸시킨, 주콥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 Life for the Tsar>(혁명 뒤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으로 제목이 바뀜)을 작곡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고, 이로써 러시아 최초의 국민적 작곡가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 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and Lyudmila>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높여준 이 오페라는 184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앞에서 공연되었다.

동양의 환상적 주제와 독창적인 선율의 이 오페라는 리스트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지만 황제와 대중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결국 <루슬란과 루드밀라> 초연은 청중의 몰이해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에 불만을 느끼고 결혼생활도 깨지자 1844년 러시아를 떠났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845년 파리에서 2편의 그의 오페라 발췌곡들이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지휘로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만족했는데, 이는 서방에서 가진 러시아 음악의 첫 연주였다.

이곳에서 글린카는 베를리오즈에게 격찬을 받고 러시아 국민음악을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1845년부터는 에스파냐 민요 연구에 착수하여 그 성과는 스페인 서곡 제1번 <호타 아라고네사, jota aragonesa>(1846), 제2번 <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 Souvenir d'une nuit d'été à Madri>(1848) 등 2개의 관현악곡에 살려졌으며, 또 유명한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1848)도 러시아 민요의 연구를 살린 것이었다.

 

1852~54년 크림 전쟁이 터져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때까지,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그러나 파리의 2월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당국은 극단적인 문화 탄압 정책을 펴고 있어서, 국민적인 글린카의 작품도 고국에서는 거의 상연되지 못했다.

그 위에 건강 상태도 나빠져 창작은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1855년 <회상록>을 써 낸 뒤로는 고대 교회 선법의 연구에 열중했는데, 1857년에 베를린에 갔다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에는 게으르면서도 붙임성있고 신경쇠약 증세가 있는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알려진 마지막 작품은 1855년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 무도회를 위한 <축전 폴로네즈, Festival Polonaise, 1855>이다.

 

러시아 음악사상 글린카의 역할은 종종 문학사상의 푸쉬킨과 비교된다.

그가 수립한 세계 최초의 국민 음악의 전통은 '5인조'나 차이코프스키에게 계승되어, 러시아 음악을 세계적인 지위로 올림과 동시에 체코와 헝가리 그 밖의 나라들의 국민 음악에의 실마리도 되었다.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최초의 러시아 음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836년에 초연한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나 1842년의 <루슬란과 루드밀라>는, 당시의 외극 가극 특히 이탈리아 가극에 심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해서, 실의 속에 또다시 외유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민족 음악을 수집하고 있는 동안 글린카의 악상도 차츰 새로워졌고, 귀국해서 바르샤바에 정착하고부터는 <카마린스키야>와 <마드리드 여름 밤의 추억> 등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글린카의 진가가 겨우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타계한 뒤였다. 

글린카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음악애호가로 알려졌으며 몇 안되는 그의 작품은 모두 귀중한 후기 러시아 음악의 토대로 인정받는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서정적 멜로디와 다양한 색채의 관현악법을 보여주며, 발라키레프, 보로딘,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자신들의 양식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의 관현악곡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 1848>가 러시아 교향악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평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콥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 1845>, <카마린 스카야, 1848>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알렉세이 루비모프 (Alexei Lubimov)

 

모스크바 출생의 러시아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루비모프는 오늘날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 당시 겐리히 네이가우스의 마지막 학생 중 한 명으로서 바로크 음악과 쇤베르크, 베베른, 슈톡하우젠, 불레즈, 리게티, 시니트케, 패르트 등과 같은 20세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쌓았다. 1968년 모스크바 데뷔 무대에서 존 케이지와 테리 릴리의 작품을 연주하였지만 1970년대 그의 경력은 전 소련에 널리 퍼져있던 이데올로기 검열제도로 인하여 주춤하였다. 이 시기에 알렉세이 루비모프는 모스크바 바로크 사중주단을 창립하여 하프시코드와 포르테피아노 연주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1988년에는 모스크바 아방가르드 페스티발 “얼터너티바"를 창립하였다.

 

1980년대 러시아에서 정치적인 제약에 점차적으로 사라지자 알렉세이 루비모프는 유럽, 미국, 일본에 걸쳐 콘서트를 가지면서 세계적인 무대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 헬싱키, 이스라엘, 로스앤젤레스, 뮌헨, 상트 페테르부르크, 로얄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BBC 심포니,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토론토 심포니,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도쿄 심포니 등과 함께 연주하였다. 1998년에는 핀란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유카 페카 사라스테의 바톤 아래 유럽 투어연주를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네 개의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또한 로켄하우스, 잘츠부르크, 라 로크 당테롱 등 수많은 페스티발에도 참가하였다.

 

루비모프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네메 예르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에사-페카 살로넨, 마렉 야노프스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로저 노링턴 경, 프란스 브뤼헨, 안드레이 보레이코, 이반 피셔, 켄트 나가노, 양 파스칼 토르틀리에 등 수많은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하였다.

 

그는 또한 실내악 연주자로서 나탈리아 구트만,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안드레아스 슈타이어 등과 같은 유명한 연주자들과 함께 자주 연주하고 있다.

 

최근 시즌에는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의 톤퀸스틀러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며 많은 리사이틀을 가졌다.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과 코펜하겐에서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를 연주하였고 2004-2005시즌에는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 덴마크 국립교향악단,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연주하였다. 2005-2006 시즌에는 텍사스 휴스턴에서 열리는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고, 봄에는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와 투어 연주를 가졌다. 2006년 8월에는 뉴욕 링컨센터의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알렉세이 루비모프는 멜로디야, 에라토, BIS, 소니 등 여러 레이블과 음반작업을 하였고 이 중에는 모차르트 소나타 전집, 슈베르트, 쇼팽, 베토벤, 브람스, 20세기 현대작품들이 포함된다. ECM 레이블로 아르보 패르트의 <라멘타테>를 안드레이 보레이코와 녹음하였고, 실베스트로프, 우스트볼스카야, 패르트의 실내악 작품 음반,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독집 음반 등이 출시되었다.